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by 영진

우리 역사는 어떻게 이렇게 대단했던 항일 무장 투쟁사를 철저히 지워버리고 덮어버릴 수가 있었을까. 우리 문학은 대체 지금까지 이 눈물겨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외면하고 뭘 써왔지.


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에게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치면서 살아온 저를

너무나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얘기를 책으로 표현을 했는데 딱 13년이 걸렸습니다.




소설을 쓰면서 주인공을 여러 번 바꿔가면서 쓰려고 했어요. 제가 선택했던 다른 주인공들도 그 한 사람 한 사람 놓고 보면 역사적으로 다 대단한 사람들이었고, 소설 주인공으로 손색없이 매력적인 사람들이었어요.


근데 누구도 항일 무장 투쟁사 전체를 일관되게 보여주면서 항일 무장 투쟁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총체적으로 보여줄 수는 없었어요.


오직 홍범도 장군만이 항일 무장 투쟁사 전체를 일관되게 보여주면서 항일 무장 투쟁에 뛰어들었던 사람이 이런 사람들이다 하는 걸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걸 깨닫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죠.


특히 홍범도 장군을 주인공으로 선택하기로 결심한 이 소설 <범도>의 주인공은 다른 소설에서는 필요치 않는 주인공의 자격 하나가 더 필요했어요. 주인공의 자격을 자리를 양보할 줄 아는 주인공이 필요했습니다.


항일 무장 투쟁 전선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무덤도 남기지 못했던 그 수많은 전사들, 그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줄 아는 주인공이 필요했어요.


혼자서 주인공 다 해 먹는 사람 그런 사람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기꺼이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줄 아는 주인공이었어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봉오동 전투 그러면 총사령관이 당연히 홍범도일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아니에요. 봉오동 전투 총사령관은 최진동이거든요.


그 봉오동은 첩첩산중에 밀림 아니고 하촌, 중촌, 상촌 3개 마을에 150가구 넘게 사는 마을이에요. 그 마을을 중심으로 당시 부산 땅 일곱 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최진동, 최운산, 최치홍 삼형제입니다.


그 사람들이 아니면 봉오동 전투에 참전한 1,500명이 넘는 독립군들을 먹이고 입힐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홍범도 장군은 기꺼이 최진동 장군에게 총사령관직 내주고 추대합니다. 그리고 본인은 그 밑에서 일군 사령관으로 봉오동 전투를 치릅니다.


그러나 전투를 이끌었죠. 최진동 장군이 훌륭하지만 나이도 자기보다는 훨씬 어리고 전투 경력도 홍범도 장군에는 비할 수 없죠.


그런데도 기꺼이 총사령관을 추대하고 그 밑에서 싸우는 홍범도 장군에게는 자리가 필요한 게 아니고 싸워서 이기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랬던 사람. 그래서 기꺼이 최진동 장군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자기는 그 밑에서 싸우고 자기 부대원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려고 했던 그런 사람이 홍범도 장군이었습니다.


-독립운동 vs 독립전쟁 | 방현석 중앙대 교수, '범도' 저자 [더 피플] 중에서(*아래 영상 참고)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줄 아는 주인공”


이 대목에서 <아름다운 저항>, <당신의 왼편>과 같은 방현석 작가님의 글에 빠져들던 때가 떠올랐다.


주인공의 자리를 기꺼이 내주는,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줄 아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작가님의 글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야말로 재미와 감동이 있는 글을 잘 쓰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2025. 8. 28.




*교과서가 감춘 진실: 독립운동 vs 독립전쟁 | 방현석 중앙대 교수, '범도' 저자 [더 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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