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이 동거하는 삶을 사는

by 영진

고통을 치유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내 상처의 내용 자체를 드러내는 데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드러낸 상처에 대한 내 시선이나 태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치유가 결정됩니다. 상사에게 심한 질책을 받은 사람이 그날 상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소 상사와 관계가 어땠는지, 상사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등 1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치열한 전장의 병사처럼 말할 때 저는 모든 체중을 실어 그의 고통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듣습니다. 제가 공감할수록 그는 더 격정적으로 생생하게 말하지요.


그후에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물으면 “내가 모멸감을 얼마나 많이 느꼈는지 알았다”거나 “내가 너무 측은하다”거나 “나는 할 만큼 한 것 같다” 등등 전투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지휘관의 말을 합니다. 마음의 지휘관 기능이 자극되었기 때문입니다. 지휘관의 시선이 생기면 그 전투를 어떻게 정리하고 마감할지 결론을 수월하게 내릴 수 있습니다.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조언을 할 필요도 없어요. 상담에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삶을 제대로 사는 것(1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내가 제대로 살았다는 것을 조망하고 확인하는 행위(2부)입니다. 병사로서 성공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나의 전투가 훌륭했고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나의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인정, 그 모든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 충분했다는 확인과 인정을 지휘관으로서 인식하는 2부의 행위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거기까지 가야 온전하고 편안한 삶, 죽음에 대한 준비를 마친 삶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남편이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쓰러지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 후 두달 여 동안 저는 그와 함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제가 더욱 절감한 것이 삶에 있어서 2부 시간의 소중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급작스럽게 이별을 한 사람들의 남은 삶이 주체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은 상당 부분 삶에 대한 정리와 확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월호 유가족들과 만날 때의 일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을 때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충분히 해주세요”라는 말을 반복해서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삶이 가슴을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상담 과정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제가 제일 많이 한 말은 “기도하자”는 것이었어요. 생전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들을 기도를 통해서 아이에게 말해주고 마음을 전하고 나눌 수 있어야 부모들이 나머지 생을 이어갈 수 있어서지요. 유가족 엄마들 중에는 눈을 뜨고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을 기도로 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기도의 일부는 아이와 미처 나누지 못했던 것들을 확인하고 다시금 전하고 인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벼락같은 이별을 한 이들의 삶과 한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벼락처럼 잃고 홀로 남거나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이별의 인사조차 남기지 못한 채 떠나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둘 중 하나가 우리의 삶입니다.


그동안 저는 내 삶의 전투에 매일처럼 참전하는 전투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정지를 겪은 후부터는 지휘관의 시선으로 나의 하루를 돌아보고 그 느낌을 매일 밤 그와 나누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은 사랑한다는 말이었어요. 그렇게 밤마다 정리하고 작별하고 아침이면 다시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이 홀가분하게 동거하는 삶을 사는 중입니다. 그 삶은 뜻밖에도 암울하거나 우울하지 않고 사랑이 넘치고 자유롭습니다. 삶과 죽음이 동거하는 삶을 또렷이 인식하기 시작한 후, 나의 매일은 꽃다발 같은 시간입니다.


-정혜신, <애도연습> 창비 2024, 5-8쪽.




"삶과 죽음이 홀가분하게 동거하는 삶을 사는 중입니다."

참 인상적인 문장이다.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문장에는 공감할 수 있다.

"그 삶은 뜻밖에도 암울하거나 우울하지 않고 사랑이 넘치고 자유롭습니다."


"삶과 죽음이 동거하는 삶을 또렷이 인식하기 시작한 후, 나의 매일은 꽃다발 같은 시간입니다.“

나의 매일이 ’꽃다발 같은 시간‘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삶과 죽음이 동거하는 삶'을 '또렷이'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나‘의 삶과 죽음만 아니라 ’나, 너, 우리‘의 삶과 죽음 말이다.

사회적 존재인 우리의 삶과 죽음이 서로 무관할 수 없다고 한다면

너의 삶과 죽음이 나의, 우리의 삶과 죽음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면


’나, 너, 우리‘의 ’삶과 죽음이 동거하는 삶‘을 ’또렷이‘ 인식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매일을 '꽃다발 같은 시간'을 살기 위해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2025. 9. 9.


매거진의 이전글모두 다 사랑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