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호주 사람처럼 나에게도 여름휴가란 해변으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바닷가에서 헤엄을 치며 자랐다. 어릴 적에는 바디 보드(body board. 배에 대고 엎드려서 파도타기를 하는 판-옮긴이)를 가지고 놀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서핑을 배우지는 못했다.
결국 50대가 돼서야 서핑에 도전할 수 있었다. 전문가가 되기에는 나이가 많았지만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히 젊은 나이였다. 그리고 2015년 여름에도 나는 호주로 돌아와서 파도에 몸을 맡겼다.
서핑을 즐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행사 소리가 들렸다. 그 행사는 고령으로 세상을 떠난 한 서퍼를 추모하는 의식이었다. 동료 서퍼들이 보드를 타고 바다로 나가 둥그렇게 원을 이루고 둘러앉아 화장한 재를 뿌렸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은 해변이나 절벽 꼭대기에서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는 최고의 서퍼 중 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고 한다.
나는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너무 일찍 태어난 바람에 엄청난 상금이 걸린 서핑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스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파도를 즐기려고 했기 때문에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나는 돈의 비도덕적인 특성에 대해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올바르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돈은 우리에게 대단히 바람직한 기회를 선사한다. 서퍼들은 해양 환경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서퍼라이더 재단(Surfrider Foundation)과 서핑 여행으로부터 비롯된 이익의 일부를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이들에게 되돌려주는 서프에이드(SurfAid)같은 환경 단체를 설립했다. 이러한 점에서 초창기의 서핑 문화는 최근의 요란한 서핑 대회와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1971년 영화 <지구의 아침(Morning of the Earth)>이 그려낸 파도와 인간의 어울림을 떠올려보라.
경쟁은 스포츠의 본질이다. 테니스 팬들은 화려한 백핸드 스트로크에 열광한다. 선수들이 코트에서 계속해서 몸만 푼다면 금방 지루해할 것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승패가 의미 없다면 누가 선수들이 공을 차는 것을 보러 오겠는가? 상대와의 경쟁이 없다면 선수들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핑은 다르다. 서퍼들은 여러 다양한 기술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운 순간을 맞닥뜨린다. 어려움은 서핑이라고 하는 스포츠에 내재된 것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상대를 물리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그래서 서핑은 테니스나 축구보다 등산이나 스키에 더 가깝다. 자연에서의 아름다운 경험 역시 서핑의 중요한 매력 중 하나다. 그리고 어려움을 이기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러닝머신을 달리거나 수영장 레인을 왕복하는 것 같은 단조로움과는 거리가 먼 활력 넘치는 육체적 활동을 수반한다.
서핑이 하나의 스포츠 종목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채점 기준이 필요하다. 이를 가지고 파도를 타는 동안 선수가 선보이는 다양한 기술을 평가해야 한다. 다이빙이 10미터 도약대에서 누가 가장 어려운 동작으로 물속에 뛰어드는지를 놓고 경쟁을 펼치는 것처럼 서핑 선수는 누가 가장 어려운 기술로 파도를 타는지를 놓고 경쟁을 벌인다.
그러나 서핑이 하나의 경쟁 종목이 되었을 때 수많은 서퍼가 즐겼던 여가 활동은 수많은 사람이 TV로 시청하게 되는 관람 종목으로 바뀌고 만다. 서퍼들이 최대한 많은 회전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경험하게 되는 아름다움과 조화의 느낌이 사라지고 오로지 점수를 따는 데에만 집중하게 된다면 무척이나 애석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서핑을 하면서 도달하게 되는 절정은 파도를 넘는 기술보다 파도의 위력과 눈부심을 온몸으로 맞는 경험으로부터 온다. 서핑을 하는 동안 가장 마법 같은 순간은 파도를 넘을 때가 아니다.
언젠가 나는 호주의 동쪽 바이런 베이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태양은 빛나고 바다는 더 없이 푸르렀으며 눈앞의 바다가 태평양을 몇 천 킬로미터 가로질러 저 멀리 칠레 해안까지 뻗어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바다 밑 바위들이 밀집한 지점에 도착하면 거대한 에너지가 용솟음치면서 내 눈앞으로 푸른 색 파도의 벽이 우뚝 솟는다. 파도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돌고래가 하얀 거품 위로 날아오른다.
그야말로 최고의 순간이다. 이런 경험은 서핑만의 보물이 아니다. 많은 서퍼들이 잘 알고 있듯이 인간은 서핑을 비롯하여 테니스, 축구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인 것이다.
-피터 싱어, ‘내가 서핑에 도전한 이유’, <더 나은 세상 - 우리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드는 83가지 질문>
박세연 옮김, 예문아카이브 2017. 원제 : Ethics in the Real World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살아있는 철학자”(뉴요커)로 불린다는 피터 싱어(프린스턴대 생명윤리학 석좌교수)의 위 책을 읽은 것이 수년이 지난 것 같은데 문득 생각난 것은 책 속의 일부인 윗글 <내가 서핑에 도전한 이유> 때문이다.
윗글의 이 문장들 때문이다.
“어려움은 서핑이라고 하는 스포츠에 내재된 것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상대를 물리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자연에서의 아름다운 경험 역시 서핑의 중요한 매력 중 하나다”
“내가 서핑을 하면서 도달하게 되는 절정은 파도를 넘는 기술보다 파도의 위력과 눈부심을 온몸으로 맞는 경험으로부터 온다”
“바다 밑 바위들이 밀집한 지점에 도착하면 거대한 에너지가 용솟음치면서 내 눈앞으로 푸른 색 파도의 벽이 우뚝 솟는다. 파도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돌고래가 하얀 거품 위로 날아오른다. 그야말로 최고의 순간이다”
내가 처음 서핑을 만난 것은 영화 <매트릭스>의 키아누 리브스 형이 풋풋한 시절에 나오는 영화 <폭풍 속으로 Point break>(1991)에서 였다. 거기서 50년 만에 한 번 온다는 파도타기를 꿈꾸는 형들이 멋있어 보였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러 남미의 에콰도르를 여행하게 되었고 세계의 서퍼들에게 서핑 명소로 알려져 있다는 몬타니타에 가서 처음 파도를 탔다. 물론, 위 책에 등장하는 대목과 같은 아름다운 경험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잠깐이지만 파도를 타는 경험은 신나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내 인생의 파도타기는 그게 전부다. 그 이후 칠레의 어느 국경 마을에서, 코스타리카의 ‘파보네스’라는 서핑 명소에서, 한국의 부산이나 제주도에서 할 기회가 없지는 않았지만 파도 타기를 하지는 못했다. 머지않아 파도에 몸을 싣고 있지 않을까 싶다.
피터 싱어는 서핑의 매력을 ‘상대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서핑에 내재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과 ‘자연에서의 아름다운 경험’에서 찾고 있다. 그 당시에도 공감을 하면서 읽었지만 지금 다시 꺼내 읽으며 공감하게 된다.
인생은 개인이 자신에 내재 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며, 자연에서의 아름다운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인생은 거친 파도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알고 파도를 타고 파도가 일으키는 어려움을 타고 넘어가는, 자연을 통해서 만나는 아름다운 경험이라는 어느 서퍼의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2025. 9. 27.
대문사진 - 몬타니타 해변, 영진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