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성의 많은 양의 비가 내린다. 기후를 걱정하는 목소리들 때문일까. 유리창을 두드리며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흙과 태양의 눈물인 것만 같다. 빗물인 듯 눈물인 듯 들러붙어 창을 수놓은 그들의 슬픔을 뒤로한 채 ‘비 오는 날의 수채화’라고 부를만한 풍경들이 떠오른다.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면/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비 오는 날의 수채화’)
어릴 적 비가 내리면 학교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아이들과 공을 차던 때가 있었지. 평소보다 두 배로 신났던 건 비가 땀을 씻어주던 시원함 때문이었을까. 비에 흠뻑 젖은 옷이며 운동화며 엄마의 잔소리와 함께 우리의 우정은 깊어만 갔지.
학창 시절 밴드를 꿈꾸던 친구가 멋 드러지게 불러젖히던 이문세의 ‘빗속에서’. 비 내리는 거리에서/ 그대 모습 생각해/ 이룰 수 없었던 그대와 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생각하네(‘빗속에서’) 졸업 후 시장 통에서 장사를 한다던 소식을 들었는데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시장 밴드’를 결성했을 것. 비 내리는 거리에서 그 아이의 모습 생각해.
20대 초 산악부에서 하계 소백산맥 종주를 하다가 만났던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산길을 걷던 그 고즈넉함도 찾아든다. 그해 가을 군에서 막 제대한 까까머리 정익이 형이 후배들과 함께 영남알프스 종주를 했었지. 나를 참 예뻐라 해주었는데.
술기운이 차면 다음 날 산행 코스까지 달리기를 하자던 형. 자기가 이길 때까지. 주사인 줄 알았는데 이제 막 선두를 섰던 나에게 후배들 잘 이끌어 가라고 미리 산행길을 익혀주려던 것이었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정익이 형의 애창곡은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내 사랑 내 곁에’)
몇 해 전 쿠바 여행에서 만난 소나기가 이제 비를 추억할 때면 생각나는 한 장면으로 남았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바라코아로 가는 버스에서 만난 소녀 때문이다. 내 손에 쥐어있던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 아이의 눈길이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갖고 싶다는 눈길이었을 것. 때마침 내리던 소나기가 소녀의 시선을 창밖으로 향하게 했다.
바라코아에서 에이스랑 일몰을 보기 위해서 올랐던 언덕배기에서 만난 아이들. 소녀도 아이들도 잘 지내겠지.
2023. 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