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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Sep 20. 2023

호네트의 인정 망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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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록 제도적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인정(認定)과 무시의 일반적인 기준을 통해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일상적 관계에 일종의 사회질서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즉, 어떤 사람과는 서로 교류하고 유대 관계를 맺으며 서로의 동등한 가치를 인정하는 반면, 어떤 사람과는 교류나 유대는 고사하고 이들을 사회에서 배제하거나 폄하하게 하는 ‘사회적 인정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호네트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인정 질서에서 발생하는 인정과 무시 현상을 사회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호네트의 이론적 관심은 어떤 사회가 올바른 사회인가 하는 점이 아니라, 인간에게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있다.      


그리고 호네트는 사회적 인정을 성공적인 자아실현의 필수조건으로 규정하면서, 이것이 보장될 때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억압된 사회를 병리 사회로 비판할 뿐만 아니라, 인정 투쟁을 통한 사회적 인정의 확대를 사회 변혁의 규범적인 목표로 설정한다. 이런 점에서 ‘병리 사회 극복을 위한 인정투쟁’이 호네트 이론의 핵심테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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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 혹은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의 문제는 헤겔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장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이 제기하는 ‘인정’ 문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의 자기의식에 대해 다른 자기의식이 대립한다. 이것이야말로 자기의식의 실상으로서, 여기에서 비로소 의식은 자신의 타자 존재 안에서 자기의 통일을 이루게 된다. 자신의 본질로 생각한 대상인 자아(Ich)는 사실은 대상이 아니다. (…) 자기의식이 대상일 경우 대상은 자아이면서 동시에 대상이다. 여기에서 이미 정신개념이 나타난다. 의식에게 행해지는 것은 정신이 행하는 경험으로서, 이는 절대적인 실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상이한 자기의식이 완전한 자유와 자립성을 가지고 대립하면서도 통일을 이루는 경험이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되고 ‘우리’는 ‘나’가 된다.”      


여기서 의식은 자기의 통일성을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한다. 타자가 없이는 ‘자기’ 일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자기 존재의 주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타자를 모두 부정하고 배제한다면 결국 자기 존재를 확인시켜 줄 타자도 함께 잃게 된다는 것이 헤겔의 논리였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헤겔은 주인이 타자로서 노예를 부정하는 경우 자신의 주권 역시 진정으로 확인받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주권이나 독립성과 같은 인간의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부정함으로써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인정함으로써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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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네트는 헤겔로부터 물려받은 인정투쟁 모델을 미드(G. H. Mead)의 사회심리학과 결합시켜 ‘인정이론’으로 발전시킨다. 그에 따르면 인정이란 개인의 정체성이나 생활방식과 관련하여 ‘상대방을 긍정하려는 일차적 의도’에 따라 수행된 행위를 말하며, 이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성공적 자아실현을 위한 필수조건이 된다.      


즉, “사회생활의 재생산은 상호 인정이라는 지상 명령 아래서 수행”되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얻을 때 그를 통해 자긍심을 획득하지만, 반면에 무시에 의해서 자긍심이 훼손되었을 때 끊임없이 투쟁하게 된다. 이러한 ‘인정’에 대한 투쟁은 단순히 자기의 물질적 이익을 위한 투쟁과는 다르다.      


인정투쟁의 촉발 요인이 자기 존엄에 대한 부정이기에, 인정투쟁은 승리자가 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무시를 통해 부정당했던 자기 존중을 되찾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인정투쟁은 타인을 해치면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 행동이 아닌 약화된 자기 존중에 반응하는 일종의 자기 치유적이며 동시에 무시라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를 치유하는 도덕적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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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정 이론적 관점에서 호네트는 사물화 문제를 다룬다. 호네트 역시 루카치의 입장을 따른다. 호네트에 따르면 루카치의 사물화 개념은 범주착오나 도덕규칙 위반과 달리 비인지적인 어떤 것, 습관 혹은 행동의 형식을 가리킨다. 개인에게 돌려질 수 있는 책임이나 과오에 대한 지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 개념은 도덕적 부당함과도 구별된다.      


즉, 호네트가 보기에 루카치의 사물화는 “일종의 사고습관, 즉, 습관적으로 고착된 하나의 관점”, “세계에 대한 ‘진정한’ 혹은 ‘올바른’ 태도가 결여되어 있음”, 또는 “우리의 삶의 형식을 이성적이게끔 해주는 인간적 실천과 태도의 결여”를 의미한다.      


또한 호네트는 루카치가 주체의 사물화 된 행동을 인간관계가 사물관계로 변질되는 사회적 삶의 상황에서, 객관 세계에서 마주치는 대상이든 사회세계에서 교섭하는 타인이든 주관 세계에서 만나는 내면적 자아든 간에 주체는 그 ‘모든 것’을 “초연함”과 “정관적(kontemplativ)”으로 대하는 것으로 파악한다고 이해한다.(AH, 28) 


그러면서 호네트는 루카치의 텍스트 여러 곳에 사물화의 강제에 물들지 않은, 인간의 세계에 대한 실천적 관계가 어떤 모습일지 보여주는 암시가 산재해 있다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그 예들을 제시한다.(AH, 26)     


활동적 주체에 관해서는 그것이 “함께 체험하고” “협력하는” 주체로, “유기적 통일체”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는 반면, 대상에 관해서는 그것들이 참여하는 주체에 의해 “질적인 독특성”으로 혹은 “질적인 본질성”으로, 내용적으로 규정된 것으로 경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호네트에 따르면 이러한 주체의 태도야말로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환경 세계에 대해 공감하는 관계를 맺는 본래적 실천”(AH, 32)이며, 사물화 하는 태도는 바로 이러한 규범적 실천을 왜곡하는 실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호네트는 루카치의 또 다른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사물화 되지 않은 진정하고 “참된” 실천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진정하고 “참된” 실천은 참여와 관심이라는, 상품교환의 확장을 통해 파괴되어 버린 바로 그러한 속성을 지닌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물화라는 실천에 대조를 이루는 본보기가 되는 것은, 집단으로 확대된 주체에 의한 객체의 산출이 아니라, 주체의 다른 태도, 즉 상호주관적 태도이다.          



5     


호네트는 루카치의 이러한 주변적인 구절에 주목함으로써 사물화 현상의 원인이 자본주의적 상품교환이나 노동과정의 합리화뿐만 아니라 주체와 객체의 이원적 분리를 전제한 객관적 인식 태도에도 있다고 본다.   

   

즉, 상품교환관계에서 교환주체가 교환대상, 교환상대자 그리고 내면세계마저도 객관적 손익계산을 위해 무감정하게 대하듯, 인식 주체가 자신의 세계를 자신과의 실존적 연관성 속에서 보지 않고, 이를 자신과 분리된 채 그저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취급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중립적으로 인식하려고 할 때 사물화 현상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호네트는 사물화를 “인정망각(Anerkennungsvergessenheit)”으로 해석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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