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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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네트는 ‘세계를 산출하는 활동보다는 상호작용의 특별한 형식’으로서의 실천을 부각하고 이러한 실천의 이상적인 모습을 “적극적 참여(aktive Teilnahme)”와 “실존적 개입(existentielle Involviertheit)”, 한 마디로 “공감하는 실천(anteilnehmende Praxis)”으로 규정한다.(AH, 35-36)
호네트가 말하는 사물화 된 태도로서의 ‘적극적 참여와 실존적 개입이 부재하는’ 태도는 루카치의 ‘정관적’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를 극복할 수 있는 근본 요인이 루카치의 경우에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라면 호네트의 경우에는 ‘인정’이다.
호네트에 따르면 이러한 실천의 이상은 ‘세계를 산출하는 활동이기보다 상호작용의 특별한 형식’이며, 따라서 호네트는 세계에 대해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태도를 세계를 객관화하는 인식적 태도의 근거가 된다고 본다. ‘인정’이 ‘인식’에 우선한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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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사물화에 대한 호네트의 이해는 우선 존 듀이의 ‘상황적 경험’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시작된다. 듀이에 따르면 모든 합리적 인식은 우리가 실천적으로 다루어야 할 환경 세계에 대한 포괄적 경험에 근거한다.
즉 모든 인식 명제는 어떤 ‘상황’에 인지적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상황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정서적, 인지적, 의지적 요소들로 구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기와 세계 관계 전체를 포괄적으로 압도한다(beherrschen)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체험에서 중요한 것은 가능한 마찰 없이 조화롭게 우리 자신의 환경 세계와 교류하려는 마음 씀, 즉 ‘상황 속의 모든 요소들에 대한 “마음씀(Sorge)”’이다.(AH, 40f/강병호, 44쪽 이하)
이러한 상황적 경험 개념은 호네트가 하이데거의 마음씀 개념을 ‘인정’ 개념과 연결시킬 수 있는 교량 역할을 한다. 즉, 하이데거는 마음씀을 자신, 타인, 다른 존재자들이 복합적으로 형성하는 상황적 경험에 대한 염려로 규정하고, 이것이 가능한 전제를 상황의 모든 구성 요소에 대한 ‘인정’으로 파악한다.
왜냐하면 어떤 중립적인 객관적 인식 행위가 아니라, 실존적 존재로서 자신의 환경에 대한 염려 속에서 이와 관계한다는 것은 해당 당사자가 자신의 세계의 모든 요소들이 갖는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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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네트에 따르면 인지적으로 세계를 대상화, 객체화시키기 이전에 세계와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소통적 실천은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린 지배적인 표상에 반하여, 인간이 실제로는 세계가 의미로 가득 찬 것으로 개시되는 실존적 공감, 즉 ‘염려(Besorgtheit)’의 양상 속에서 현존하고”(AH, 39)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이 실존적 존재로서 자신의 환경 세계에 대해 갖는 근원적 관계는 인정 관계이며, 인식론적 주객 관계는 이러한 근원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그에게 사물화 현상은 단지 이원론적 주ㆍ객 분리 하에서 세계를 객관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인식 관계의 배경을 이루는 세계에 대한 인정을 망각하는 현상이다.
호네트는 우리의 인식 활동의 출발점이 되는 세계에 대한 인정을 망각할 때, 우리는 세계를 한낱 객체로 지각하게 되며, 따라서 세계는 단지 관찰 가능한 객체들의 총체로 나타나게 된다고 주장한다.(AH, 62-77) 그렇다면 호네트가 말하는 ‘인정망각’의 구체적인 예는 어떤 것인가?
호네트가 말하는 인정망각 현상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종의 ‘주의력 약화’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어떤 활동을 수행할 때 우리는 단지 하나의 목적에 집중한 나머지 그 근원적인 동기나 목적을 망각할 때가 있다. 가장 친한 친구와 재미 삼아 테니스를 치다가도 승부욕에 집착한 나머지 그 상대방이 바로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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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환경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라는 목적에 치중한 나머지 이 목적이 자립화되고 우리는 이에 선행하는 인정 관계를 망각할 때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할 때 특정한 고정관념이나 사고 틀에 영향을 받게 되면 이 활동 상황에 대한 선택적 해석에 치중할 수밖에 없고, 결국 이 상황 속에 내포된 다른 요소들에 주의력을 잃게 된다.
그러나 호네트가 이렇게 인정 망각을 부지불식간에 일어날 수 있는 불가피한 현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상적 인정 망각은 곧바로 자신의 행위 상황을 되돌아볼 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정 망각이 곧바로 사물화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사물화 현상은 객관적 인식을 고착화하는 어떤 제도화된 실천이나, 선행하는 인정 관계를 부정하도록 강제하는 특정한 사고방식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든다면 전자의 경우에는 개인에 대한 신상명세서 작성과 같이 개인의 정체성을 자료화하는 사회적 제도가,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해타산적 사고방식과 같은 특정한 사고들이 해당될 수 있다.(AH, 62f)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