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짐)
10
루카치와 아도르노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주체의 수동적인 태도 못지않게 호네트의 논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사물화가 야기하는 심각한 결과는 개별 주체들의 상호무시와 적대적인 관계이다. 즉,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서로 무관한 듯 무관심과 냉담함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상호 인정이 아니라 상호 무시가 지배적인 주체들의 태도가 되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 아니 존재 자체가 이미 대상(자연, 타자, 자기 내면)을 전제로 하는 행위라고 했을 때, 대상의 객관화, 즉, 사물화의 특징으로서 수동성 및 ‘정관적’ 태도의 또 하나의 측면으로 지적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만 보는 태도 역시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상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위한 ‘거리두기’로서의 객관화와 대상을 지배와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서로의 관계를 적대시하도록 만드는 사물화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러한 구분에는 나 스스로가 조작과 지배의 대상이 되어 무관심과 억압 속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뼈저린 현실 인식과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
11
그런 이유에서 호네트가 개별자들의 적대적인 관계를 극복할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각기 정서적 존재로서 타인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인정하는 ‘사랑’이나, 각기 개성적 존재로서 타인을 공동체의 가치 있는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연대’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과 ‘연대’가 실현되기 위해서라도 인정 주체들의 관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사소한 경제적 이해관계나 계급적 대립, 권력다툼 앞에서 인정에 대한 논의가 무기력해지는 현실을 우리는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호네트의 논의는 자칫 지배자들의 논리에 매몰될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는 점도 문제적이다. 즉, 현재의 (지배) 상태를 인정하라는 인정테제는 지배력을 위해서 더없이 유용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의 고유성에 대한 상호 인정을 망각하도록 만든 현실이야말로 그 인정이 무엇에 대한 어떠한 성격의 인정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즉, 자본가와 노동자 각자의 계급 내부에서는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정 망각을 야기한 원인이 계급 갈등과 지배를 위한 폭력적인 야만성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계급 갈등과 야만적인 폭력성을 넘어 사랑과 연대를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계급 갈등과 야만적인 폭력이 사라진 사회가 전제되어야 한다.
12
그래서, 잊어버린 인정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차별 없이 더불어 살아가고 싶어 하는 이들의 작은 욕망을 무참히 짓밟는 불평등 구조를 면밀히 파악하고 지양해 나가는 일이다. 물론 인정과 사랑과 연대의 공간은 주체들의 노력에 의해 늘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공간을 파괴하려는 또 다른 지배 주체들의 노력 또한 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인정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노력과 그러한 공간을 파괴하려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늘 함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정과 사랑의 평등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경우, 주체들이 모두 똑같이 인정을 받아야 한다며 인정의 평준화를 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유일무이한 존재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태도일 수 있다. 형식적인 평등에 대한 요구는 획일화의 도구가 될 뿐이다.
그래서 진정한 인정은 차이 속의 인정일 수밖에 없고, 인정을 위한 투쟁 또한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차이에 대한 인정의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성을 인정받으려 함으로써 행하는 폭력은 줄어들 것이며, 인정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희생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한 인정의 과정 속에서만 진정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연대의식이 싹 틀 수 있을 것이다. 상호 인정을 통해 동일성을 확보함으로써 연대의식을 싹 틔우되 그 동일성 속에서 차이를 인정해 주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13
주정립은 호네트의 ‘인정투쟁 모델’이 이데올로기 비판의 관점에서 공백을 드러낸다고 적절한 지적 한다. 호네트의 주장처럼 정의롭지 못한 상태에 대한 인식이 저항의 출발점이라고 할 때, 과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일상적 의식이 어떻게 정의롭지 못한 상태를 인식하고 저항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주정립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범주는 자본주의의 일상적 행위자들이 필연적으로 받아들이는 의식 형태로서 왜곡된 현실 인식의 토대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경제적 범주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상의 의식이 지배하는 한, 그 이면에 은폐된 착취 관계는 그 무엇보다 근원적인 사회적 부정의의 원인임에도 저항의 대상 범위에서 비켜나게 된다는 것이다.
호네트에게 이데올로기적 의식형태가 부정의의 근원 인식 및 그에 대한 저항의 전망과 관련해 초래할 수 있는 근본적 제약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재하는 한, 그의 인정투쟁 모델이 저항의 가능성과 조건에 대해 지니는 이론적 역량 역시 그만큼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정립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경제적 범주’(임금, 지대, 지대를 통한 은폐된 착취관계)인데, 그렇다면 그러한 경제적 범주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들은 그러한 ‘경제적 범주’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착취 관계를 인식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경제적 범주 자체가 인식을 방해하는 요인이라면 경제적 범주가 변화되지 않는 한 대중들은 영원히 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생산력의 발전을 믿으면 될 것인가? 호네트가 자본주의의 착취 관계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주정립의 문제 제기는 타당하다.
하지만 호네트가 제기하고 있는 도덕적 규범으로서의 부정의에 대한 저항은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 권력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도 ‘인정’을 통한 사물화 극복을 위해 중요한 문제제기일 것이다.
A. 호네트, <인정투쟁>, 문성훈 역, 동녘 1986 / A. Honneth, Verdinglichung, Frankfurt/a. M., 2005, S. 24. 이 책에 대한 인용은 ‘AH, 쪽수’로 표기함.(국역본, <물화>, 강병호 역, 나남 2006) / 주정립, 「호네트의 인정투쟁모델의 비판적 고찰을 통한 저항 이론의 새로운 모색」, 『민주주의와 인권 제11권 2호』,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2005
2011.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