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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발전에 기여한 ‘인지혁명’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말’(언어)은 소통하고 상상하고 창조하는 즐거운 행위를 훌쩍 뛰어넘는 의미를 가진다. 얼마나 말을 잘했길래 천 냥 빚을 갚았나 싶기도 하고 무슨 말을 했길래 살인을 불렀나 싶은 것이 ‘말’이다.
‘말’이 곧 권력이라 말 안 들으면 혼난다. 그래서 말 안 듣는 것은, 말 안 하는 것은 불만의 표출이자 반항과 저항의 징표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긴 말 하지 않아도 말의 ‘힘’이 사소하지 않음을 알고 있듯이 ‘말’에 대한 관심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은 참 많은 말들을 한다. 남의 일에 대해서, 어떤 대상이나 사회 현상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는 것이다. 그런 말들을 통해 사람들은 즐거움을 나누기도 하고 잘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된다. 인지혁명의 동력일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말 때문에 때론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유명인들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사소한 다툼을 넘어 살인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잘 알지도 못한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잘 알고 말하라거나,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안다는 것은, 그것도 ‘잘’ 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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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안다고 말하는 사실들은 남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이다. 그 ‘남’이라는 것이 ‘책’이나 ‘언론이나 영상매체’일 수도 있고 ‘사람들의 말’ 일 수도 있다. 우리는 남을 ‘통해야’ 무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구를 통해서, 어떤 책이나 언론 매체를 통해서 안 것인지, 그 남이 ‘어떤 남’ 인지도 중요하다. 대개 ‘통한대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남’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 혼자 안다고 확신할 수 있을지언정 내가 아는 것이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조차 ‘남’을 ‘통해야’하는 것이다. 더구나 ‘잘’ 안다는 판단이 필요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인지 판단해 줄 ‘잘’ 아는 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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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의 양, 많이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잘 알기 위해서는 내가 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확인하는 ‘성실성’이 중요하다. 확인을 많이 하면 할수록 ‘잘’ 알게 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잘 안다는 것은 ‘확인 과정’을 여러 번 거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잘’ 안다는 것은 완전하고 완벽하게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확인 과정’을 거치고 거쳐도 여전히 잘 모르는 부분은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잘 안다는 것도 확인 과정 중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중요해지는 것은 ‘확인 과정’이다. 확인하지 않는다면 잘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확인 과정에서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알고 있던 것에 있던 오류를 줄여나가게 된다. 그렇게 잘 ‘알아가는’ 것이다.
‘잘’ 안다는 것은 대상이나 사태의 본질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많이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대상이나 사태를 이루는 현상만 많이 알고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잘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 중요해서 본질적이지만 감추어지거나 가려지기 때문에 더 중요하지만 잘 알기 어려운 것이 본질이기도 하다.
그런 본질을 알려고 노력하고 알아내야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말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도 그런 본질적인 측면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사실인데 잘못 알고 있다가 ‘확인 과정’ 없이 믿거나 함부로 말하거나 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본질을 가리거나 은폐하는 것은 지배 세력이 자신들의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데 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본질은, 더 중요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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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지배 관계를 만드는 본질적인 부분들을 모른다면 사회를 ‘잘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 본질적인 부분을 모른다면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지배관계가 삶을 억압하고 불평등하게 만들어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본질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을 알아야 하고 그럴 때 그 대상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가끔은 침묵하고 싶거나 귀를 막고 싶을 때가 있다. 대상이나 사회의 온갖 현상들에 대해 많이 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현상들을 현상하게 하는 본질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말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본질을 현상하게 해 주기에, 현상을 통해 본질을 알 수 있기에 현상은 중요하다. 하지만 현상만을 말하는 데 그칠 때 찾아드는 피로와 공허는 흔히 겪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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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일 수도 있다는, 허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는 늘 필요하다. 완전히 진실인 말도 완전히 거짓인 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부단히 진실을 추구할 때 거짓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진실은 아니지만 거짓을 말할 수도 있지만 말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은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말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경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을 말하게 된다. 보고 들은 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사실인 양 말할 경우 자신도 모르게 거짓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런 점에서 남의 말을 ‘확인 과정’없이 믿을 경우 거짓을 진실로 알고 살아갈 가능성도 높아진다. 거짓이 때로는 필요하고 자신에게 유리할 때도 있다. 하지만 모두를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이 거짓의 운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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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대로 알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지만. 더 열심히 말해야 할 것이다. 말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다. 말함으로써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다. 다만, 거짓이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삼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하는 말로 생사람 잡는 일에 공모자가 되지 않으려면, 또한 언젠가 그들에게 생사람 잡히지 않으려면, 거짓보다 진실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 노력이 거짓과 상처의 대상이 되지도 만들지도 않을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자신이 안다고 말하는 사실들이 사실에 가까운지 확인해 보는 것, 어느 사실이 사실에 가까운지 생각해 보는 것,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내게 유리하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일 뿐인 사실은 아닌지 의문을 가져보는 것, 잘 알기 위한 요건들일 것이다.
말하지 않고 살 수 없는 인간이기에 말하고 듣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 될 수 있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별 말도 아닌데 말이 길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20. 일부 내용 참조.
2021.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