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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Dec 20. 2023

‘모순의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차이 나는 것들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유토피아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아도르노)     


‘차이와 모순’에 관한 표현에서 아도르노의 것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을까.     


오직 문제는 ‘모순의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에 있다고 여긴다.     


아도르노의 표현에서 이목을 끄는 것은 아도르노가 ‘유토피아’를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아도르노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면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도르노가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목을 끄는 것이다.     


만일, 아도르노가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를 염두하지 않고 단지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이미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립물의 통일의 상태인 ‘모순의 바다’에서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면 그뿐 아닌가. 그렇게 ‘주인과 노예의 변증’으로서 상호 전도의 상태를 반복하면 그뿐 아닌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실제 인간의 역사는 그렇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되고 있는 주인이 되기 위한 전쟁의 역사 말이다. 그것도 소수 권력자들에 의해 대다수의 민간인들이 죽어가는 그런 전쟁과 학살의 역사 말이다.      


현실을 ‘모순의 바다’ 그 자체로 인식하는 이들에게, 차이에 대한 존중이나 사랑의 상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일 수밖에 없다. 오직, 주인이 되기 위한 생사를 건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사고를 가진 자들에게 차이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상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지, 주인과 노예가 없는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상태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한편으로, 현실에 ‘모순의 바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오직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차이에 대한 존중이나 사랑의 상태와 같은 유토피아는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엄연히 현재 하는 ‘모순의 바다’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그 ‘모순의 바다’를 건너지 않고는 유토피아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모순의 바다’를 상정하는 아도르노의 현실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겠다면 현실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자본독재권력은 장애인, 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어린이, 노인을 자신들과 단지 다를 뿐인 차이의 관계에 있다고 여기며 존중하며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혐오하고, 차별하고, 착취하고, 억압하고 있는가.     


현재는 아니더라도 그들은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가능한가, 오직 사회적 약자들의 일방적인 희생에 따른 자본독재권력에 대한 존중과 사랑에 의해서라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간의 존중과 사랑의 상태는 아닌 것이다.     


현실에 ‘모순의 바다’는 존재하지 않는가, ‘모순의 바다’가 존재하더라도 그 모순의 관계는 알고 보면 차이의 관계일 뿐이라서 존중과 사랑의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인가.     


현실은 ‘차이의 바다’만으로, 또는, ‘모순의 바다’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모두의 바다라고 한다면,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모순의 바다’는 어떻게 건널 수 있을 것인가.          



2023. 12. 20.   



09화 아도르노의 짜임관계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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