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던류 중에 특히 들뢰즈 인식론과 이른바 정통 맑스주의 쪽의 사유 방식, 그 양자 전체에 대해서 비판적인 측면이 강하다. 변증법 자체의 특징이라고 아도르노가 들고 나온 것이다.
이렇게 명시적으로 인식론적인 논리를 전개해 놓은 건 다른 데서는 잘 못 봤다. 그걸 아주 명확하게 다루고 있어서 이것을 근거로 현대 철학에서 논의되는 것들에 대해서 일정하게 경계도 할 수 있고, 또 반대로 정통 맑스주의 쪽의 좀 딱딱한 사고방식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도 있고, 좋은 측면이 있다.
아도르노의 사고방식을 정통 맑스주의 쪽에서는 수정주의 내지는 기회주의로 몰아갈 수도 있고, 거꾸로 포스트 모던 쪽에서는 여전히 개념적 사유 틀에 얽매여 있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그 양쪽 모두에 대해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논리를 펴고 있다.
그때 핵심이 모순이다. 마오쩌둥 같으면 거의 모든 것을 모순에 근거해서 설명한다. 아도르노는 모순도 제일 원리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모순이 중요하다는 것도 인정한다. 사유 방식에 불가피한 면이 있고 사유 방식만이 아니라 현실 자체에서 그런 모순 문제가 근본적으로 발판이 되고 있다.
이 두 가지를 위해서 사유 방식 차원과 현실 차원에서 모두 의미 있어서 모순이 중심 개념이라는 건 인정하는데 모순으로 모든 걸 끌고 가는 건 또 아니라고 본다. 또 모순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포스트 모던 쪽의 반발이 있다,
그쪽은 아무래도 ‘차이’다. 다양한 차이들이 있을 뿐인데 왜 모순으로 자꾸 몰아가냐 한다. 이에 대해서 아도르노는 사유가 끊임없이 뭔가를 따라가면서 그냥 나타나는 대로 계속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변증법이 아니라고 본다.
일정하게 규율을 부여하려는 것인데 사유 규율을 찾는 것인데 그때 사유 규율이라는 것이 그 대상에 무리하게 폭력적으로 하는 것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그건 불가피한 면이 있다. 아무 규율 없이 사유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정반합이니 뭐니 이런 틀을 완전히 버리는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사유가 대상 자체에 그냥 자신을 그대로 맡기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어떠한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유가 대상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대상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려고 하는 노력, 그것으로 서로를 보완한다는 것이다. 실제 대상을 개념에 근거해서도 보고 동시에 개념을 그 대상에 근거해서도 수정해 가는 양자 관계가 필요하다.
개념 틀만 가지고 대상을 재단해 버리는 것도 잘못이고, 또 대상의 흐름에 그냥 끝없이 따라가는 것도 잘못이다. 그 양 측면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근데 형식적으로는 모두 맞는 말인데 실질적으로 그렇게 하는 게 어느 선까지냐 할 때는 또 어렵다.
어떤 현실 문제가 벌어지든 간에 그 문제를 놓고 자기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개념들만 가지고 설명하거나 예컨대 모든 게 누구 탓이야. 모든 게 자본주의 때문이야. 그러면서 자본주의와 그 문제 간의 실질적인 관계를 안 보거나 못 보거나 설명 못 하거나 한다.
저건 전부 자본주의가 저렇게 만든 거야 하면 추상적이다.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만든다는 틀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성이 있으려면 실제로 자본주의와 그 문제 간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명확하게 봐야 한다. 그런 것들이 ‘매개’ 문제와 연결된다.
그럴 때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핵심적인 문제를 못 보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본주의 때문이다. 또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로 다 해석한다. 아니면 담론의 문제로 접근할 때 구체적인 해법이나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얘기해 버리고 구체적인 연관을 안 본다는 것이 문제다. 또한, 구체적인 것을 얘기해야 한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어떤 문제도 얘기 안 하고 그냥 온갖 현상들만 쭉 얘기하는 것도 문제다.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했으면 왜 문제인지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다. 그것이 노동자 착취만 있는 것도 아니다. 착취라고 한다면 왜 착취라고 얘기하는지부터 왜 그런 현상들이 생겨나는지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야,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문제구나 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영진, '모순이 중심이다', <도시의 무지개> 310-3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