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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Sep 23. 2023

사랑하여 아름다운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읽기

1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작가가 아내에게 바치는 글이기도 하지만 ‘역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당신을 위해’ 쓴 글이기도 하다. 작가는 소설을 읽는 당신에게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거라고, 사랑받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거라고’,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윤택한 삶을 위한 일과 결혼이라는 영리 활동을 하면서도 사랑을 하는 기분, 사랑을 받는 기분... 같은 걸 느끼고도 싶은 거’라고 말한다.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는 한은 인간은 끝까지 스스로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동물’이라고, 그래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사랑이야말로 자기 삶의 권력, 자신의 삶을 살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권력은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함으로써 대중을 지배하려 든다. 권력은 대중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아름다워지라고 유혹한다. 순수의 이름으로, 욕망의 이름으로, 희생의 이름으로, 그리하여 아름답게 권력을 사랑하는 주인이 되라며 유혹한다. 권력의 사랑과 아름다움 앞에서 대중들은 현혹되기 십상이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 그 사회의 지배권력이기 때문이다. 지배 권력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것은 미움받아 마땅한 추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아름답기까지 하다.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은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지배적인 욕망을 인식하고 거부하는 일이기에, 그리하여 동시에 자신을 거부하는 일이기에, 그만큼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욕망을 꽃피우는 일이기에. 그 자체가 아름다운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해야 한다면, 아름다워야 한다면 소설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지,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물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진리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만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진리를 말하자면 늘 비非진리에 대해서도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 진리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사랑에 대한 여러 진리들에 공감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 사랑이 아니면 사랑도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오해가 사랑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이 오해인지 아닌지는 끝내 알 수 없다. 그 오해가 사랑을 불러 사랑을 이룬다면 그것은 오해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면? 사랑이라고 오해했을 뿐인 것이다. 그뿐이다. 중요한 것은 오해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고, 확인할 필요도 없는 오해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를 통해 사랑을 이루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서로에 대한 높고 깊은 이해가 사랑을 이룰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오해했든 이해했든 오직 너라서 사랑한다는 자기 확신을 갖고 돌진(?)할 때 사랑을 쟁취할 가능성이 높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작가는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오해로 이룬 스무 살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3


엄마는 자신이 사랑했을 아이의 사랑을 지켜주지 못했다. 사회가 지켜주지 못한 사랑을 엄마라고 지켜줄 방도가 없었다. 엄마 역시 그 사회의 사랑받지 못한 일부일 뿐이었다. 여자는 그 사회를 떠남으로써 스스로 사랑을 지킨다. 작가는 스스로 서로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자기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남의 얼굴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남의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상상해 주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삶을 긍정해 주는 긍정의 생명력을 서로에게 불어넣어 주는 것, 사랑이리라. 그처럼 삶을 긍정해 주고 생명을 살리는 것들은 아름답다. 그리하여 작가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여 아름다운’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위즈덤하우스 2009.



2021.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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