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주고 싶었다

by 영진

내 생각은 순식간에 활활 타올라 비선형적으로 저 먼 우주까지 떠나갔다가 어느새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차갑게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언제 정리를 했냐는 듯 또다시 이리저리 튀어 다닌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게 이상하거나 나쁜 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오로지 내 머릿속의 생각만으로 혼자 큭큭거리며 재미있어할 때가 많다. 그래서 드물게 내 흥미를 끌면서, 나를 궁금하게 만드는 사람을 좋아한다. 나를 더 생각하게 만들고, 내가 미처 못 본 관점을 알려주는 사람에게 끌린다.(생각과다인의 사고전개 과정)



그런데 그 발레리노 선생님은 내 옆에 딱 붙어 자세가 그게 아니라며 나를 막 다그치더니, 팬티라인 앞뒤 전체, 허벅지 안쪽을 넘나들며 주무르고, 내 엉덩이를 꾹꾹 누르고 움켜쥐었다. 힘을 더 주라느니 하면서. 만약 선생님 손에 빨간 잉크가 묻어있다면 내 성적 수치심을 자극할 법한 중심부 인근은 아주 새빨갛게 물들었을 거다. 성범죄만의 특수성이 있다. 오직 당사자만이 완전한 진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성범죄의 모호함에 대하여)



언젠가 그 애는 내게,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늘 책상에 엎드려있던 깜깜한 밤 같던 그 애의 모습과, 내가 달이 되어 그 밤을 밝혀주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해였을까 달이었을까. 결국 그 애의 세상에서 떠났으므로, 아무것도 아닐까.(첫사랑)



하지만 그 대부분의 고통을 제외한 10퍼센트 때문에 나는, 그리고 그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운동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고통을 감수할 것이다. 내가 내 근육을 움직여 어떤 동작을 수행해 내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견디고, 단련하고, 성취하고, 변화해 가는 과정은 내 몸뿐 아니라 정신의 모양까지 아름답게 가다듬어 준다. 건강한 성취를 위한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견딜만 하고, 견딜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몸을 쓰는 고통과 즐거움)



하지만 우리는 결코 전면적으로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내 경험에 빗대어 어렴풋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네 마음을,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하는 태도는 자칫 오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태도는, 손을 내밀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어쩌면 내가 상대의 우위에 있다는 시혜적 태도를 전제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남을 돕고자 할 때, 그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내 도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진정 상대를 위하는 것이 맞는지 여부에 대하여.(연민의 양면성)



그 애가 이전에 수십 번 그래주었듯, 매몰차게 돌아서는 내 손목을 붙잡고 안아주리라 생각해서, 습관처럼 우리 이제 그만해. 했던 게, 영영 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스물세 살의 어느 여름밤. 나는 불 꺼진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엉엉 울었다.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때였다.(자기소개)



하지만 모니터에 떠있는 내 뇌의 단면 그림 속 알파파가 어쩌고 베타파가 어쩌고 빨갛고 노랗고 파랗고 복잡하게 얽힌 선들은 내가 사실은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고 알려주었다. 오랫동안 스스로를 속이고 살아온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그간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안아주고 싶었다.그간 풀가동해서 탈진상태라는 내 불쌍한 뇌를 회복시키기 위해 결국 나는 넉 달째 착실하게 약을 복용하고 있다.(가위)



그렇게 종종 조사 일정이 생길 때마다 나는 한참 전부터 의상과 메이크업 고민에 빠진다. 당일날 출근하면 선량한 회사 사람들에게, 오늘 컨셉은 차가운 도시 여자 수사관인데 그렇게 보이는지 의견을 묻고 다닌다. 사람들은, 합격입니다. 차가운 도시 여자 수사관처럼 보여요. 하며 호응을 해준다. 그럼 나는 흡족해한다. 아이라인도 좀 올려 그리고, 입술도 평소보다 짙게 바른다. 검사님은 그런 게 쓸데없다고 한다.(피의자를 만나는 마음)



2025. 12. 4.




문장 출처 - Ubermensch의 브런치스토리 괄호 안은 글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