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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Oct 03. 2023

마라와 사드

페터 바이스 <마라와 사드> 읽기

1      


페터 바이스의 <마라와 사드 Marat/Sade>에는 작가의 사회변혁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변혁을 위한 개인의 희생과 권력에 대한 고민들은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을 통해서 그가 품고 있는 고민들을 따라가 보는 것은 의미 있어 보인다.     


개인은 사회로부터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드가 제기하는 마라식 혁명의 문제점은 개인의 자율성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즉, 마라에게는 ‘현실을 무심히 보는 대신, 옳고 그른 것을 주장하고 그릇된 것을 바꾸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사드는 “왜 바깥세상의 걱정을 하나? 내게는 나 자신의 내면세계가 훨씬 더 또렷한 실체일 뿐”이며 “나는 오직 나만을 믿을 뿐”이라고 말한다.     


사회 속에서 개인들에게 법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규율과 통제는 개인들이 모여 살아가기 위해서 불가피한 것 아닌가? 문제는 그러한 규율과 통제가 개인들에게 억압으로 느껴질 때 독재국가나 획일적인 전체주의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규율과 통제가 개인들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쿠제의 지적처럼 과잉억압과 필요억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필요와 과잉의 경계를 누가,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억압에 대한 경계 역시 자의적으로 규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개인들이 억압으로 느낀다면 그 순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개인들이 얼마나 사회의 규율과 통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쪽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마라처럼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개선하려 노력한다면 권력에 의한 과잉억압이 생겨나기 힘들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그러한 과잉억압이 있음에도 개개인들이 억압으로 느끼지 않는 경우일 것이다. 헉슬리나 아도르노의 지적처럼 ‘노예상태를 사랑하는 현상이나 대중들의 체질화된 수동성’은 현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 아닌가?            



2     


마라와 사드 사이에서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문제는 당 중심의 변혁이냐 자율적인 주체들에 의한 변혁이냐는 문제일 것이다. 독점 권력에 맞서기 위해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위해 개인들의 연대는 필요하다.      


그런데, 그 중심이 당이냐, 아니면 각성된 자율적인 주체냐의 문제인 것이다. 사드가 보기에는 마라식의 방식으로, 즉, 몇몇 지도자가 이끄는 당 중심이 되었을 때, 그 당이 또다시 권력화하여 민중들을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성 된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인한 사회변혁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에 의해 개인들이 조직되지 않은 자율적인 주체들에 의한 사회변혁이라는 것은 멀게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지롱드파의 뒤삐레와 꼬르데이가 말하는 “모두 단결되었으면서도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사회, “개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기대는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지향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가 된다면 굳이 개인에 대한 규율과 통제로 인한 과잉억압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개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부와 권력을 나누며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굳이 마라와 사드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3      


과연 누가 ‘희생’되어야 하고 누가 ‘권력’을 장악하는가의 문제일까? 즉, ‘누구’의 문제일 뿐일까?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 정치가 무서운 사건이었음에 틀림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과연 빈곤과 실업의 참상에 비하면 어느 쪽이 더 무서운 것인지, 사회변혁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희생은 그것이 아무리 비싼 대가라 할지라도 결국 그들이 제거하고자 하는 해독이나 현 제도하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참상보다 가벼운 것이 아닌지, 프랑스 혁명의 공포가 우리 가슴 속에 거창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다수의 거룩하신 귀족들이 희생자가 되었고 또 우리는 특권층이 곤경에 빠지면 더 애처롭게 생각하는 습관이 있을 정도로 그들을 존중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은 아닌지, 물을 수 있다.      


혁명을 통해 얻게 되는 대가는 희생에 비할 바 아니라고, 귀족들의 희생과 대중들의 희생을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변혁의 과정에서 겪는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며, 오히려 고귀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귀족들의 희생이라면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드는 말한다. “교수대의 칼날은 떨어지기 바쁘게 다시 감겨 올라갔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서 복수의 의미가 사라지고 그저 기계적으로 변한 거야. 교수형이란 재미도 없고 비인간적인 데다가 기술적으로 처리되다니. 마라, 그 제서야 나는 알았어. 이 혁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제 각 개인의 특성은 사라지는 거야. 그 대신 서서히 획일화되어 가지... 이제 국가는 각 개인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막연한 전체가 있을 뿐이지.” “사람들에게는 튼튼한 쇠사슬로 연결된 것 같은 강한 연대 의식이 없어. 아니 실낱같은 공동의식조차 안 보이지. 그런데, 자네는 아직도 온 인류가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고 믿나? 이상주의자 몇 명이 화합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해냈다는 결과가 뭐지? 하찮은 일 때문에 서로 죽이는 꼴 아닌가.”


이러한 사드의 냉소 속에는 어떠한 권력도 거부하겠다는, 어떠한 개인에 대한 억압도 거부하겠다는, 어떠한 형태의 정부도 거부하겠다는, 오직 개개인들의 자유로운 조화를 바란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르쿠제가 지적하는 것처럼, 사드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사회란 인간의 자연스러운 충동의 발산과 자기실현의 자유로운 공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사회인 것이다.     


페터 바이스를 통해서 어떠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페터 바이스 역시 배고픔과 독점 권력에 의한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서의 공동체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작가가 보기에 마라와 사드는 모두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혁명가들이다.      


다만 서로 다른 길을 가고자 할 뿐이다. 마라식의 정치 권력을 통한 혁명과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성(性)의 해방을 통한 혁명, 어느 한쪽만을 선택할 수는 없는 문제일 것이다. 당내의 민주화와 개인들의 끊임없는 각성에 대해 요구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4      


페터 바이스의 <마라와 사드>를 통해 혁명에 대해 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그의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주목을 받으며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 있어 보인다.    


하지만,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조심성, 안락과 순응주의, 가족이기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예찬. 자신에 만족하며 정신적인 것보다 물질에, 가능성 있는 것보다 수익성에, 미지의 것보다 이미 아는 것에 우위를 두는 개인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보다 현재의 세상에 만족한다고/만족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가진다는 것은 ‘권력에의 의지’일 뿐일까? 아니면, 더 나은 세상 만들기의 어려움과 불가능함을 경험해버린 패배주의자들의 비겁한 변명일 뿐일까?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쁜, 너무나 각박해져 버린 현실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한낱 몽상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적어도 더 낫지는 않더라도 지금과는 다른 세상에 살아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라고 한다면 현실 만족이라는 것 역시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안락한 현실이라는 환상을 생산해 내는 지배이데올로그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환상 속의 현실 역시 현실이기는 하다. 결국 어떤 현실을 살아갈/만들어 갈 것인가? 라는 물음은 개인의 선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자신을 포함한 다양한 주체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다르게 생성될 수 있는 진행형으로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페터 바이스, <마라/사드>, 박준용 옮김, 지만지드라마 2023.



2011.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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