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사랑 30

by 영진

지독한 믿음




<그 해 우리는>의 웅이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연수와의 이별의 순간을 교통사고에 비유하자면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초대형 사고에 해당할 것이다. 이유조차 알 수 없는 교통사고, “내가 가진 것 중에 버릴 게 너밖에 없다”던 연수의 ‘독한 이유’를 알아차릴 새도 없이 버림받은 웅이가, 연수로 인해 인생 포기한 폐인처럼 살던 웅이가, 5년이나 지나 드라마처럼 유명 작가가 되어 다시 연수를 만나, 두 번은 없을 것 같던 사랑을 하고 마침내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는 드라마는 작가의 ‘소망’ 드라마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의 연애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을 수 있다’ 던 드라마 속 피디의 말처럼, 위대한 작가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 드라마에 전형적인 현실을 담을 수 있을지언정 그보다 더 전형적인 현실은 여전히 현실 속에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현실은 하나가 아니니까 말이다.


현실적인 것만도 소망적인 것만도 아닌 현실적인 소망, 현실에 근거한 소망이 담겨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단지 작가만의 소망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일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헤겔)이라는 말을 ‘현실적인 것이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믿게 되는 순간이다.


현실 속의 작가이기에 현실이 작가를 만드는 것이지만, 현실 속의 작가이기에 작가가 현실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실은 인간들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간절한 소망이 함께 한다면 바라는 현실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연수와 웅이가 상처로 인해 사람에 대한,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되어준 연수 할머니, 웅이 양부모와 같은 사람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가난으로 상처받은, 버림받아 상처받은 연수와 웅이의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가진 상처로 인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믿음이 두 사람의 사랑을 다시 꽃 피워준 것이라고 믿게 된다.


연수 할머니와 웅이의 양부모가 그들을 낳은 친부모가 아니라는 점에서 할머니와 양부모가 보여주는 믿음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들이 보여준 믿음이 ‘사회적인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즉, 사회에 그런 믿음이 있다는 것은 가난의 상처, 버림받은 상처가 상처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 절망할 수밖에 없음에도 소망하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믿음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하기에 자신보다 더 삶을 소망하게 하는 사회와 그런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이루는 믿음이 무너지면 사회도 사람도 자신도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난과 버려짐’으로 무너져 가는, 파괴와 분열로 파멸해 가는 인류의 시간 속에서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한 줄기 빛과도 같다.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믿음의 빛이 발하고 있다는 것은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근거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밝혀주는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일 테다. 그들의 지독한 믿음으로 인해 견고할 리 없는 세상은 견뎌지고 있는 것일 테다.



-하영진, '그 해 우리는: 지독한 믿음', <보라의 시간> 48-51쪽 부분 발췌.




보라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