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향유

by 영진

칸트가 주장하는 무관심성 속에는 향유가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숨어 있다. 아마 상식과 순응적 미학이 실제로 즐기는 일을 모델 삼아 예술의 향유라는 말로 상상하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경험적 주체는 단지 한정되고 변형된 상태로만 예술 경험 자체에 관여한다. 작품의 수준이 높을수록 그러한 관여는 적어질 것이다. 예술 작품들을 실제로 즐기는 사람은 속물이다. 귀의 성찬 따위의 말이 그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향유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면 도대체 예술 작품들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로 당혹스러워질 것이다. 예술 작품들을 많이 이해할수록 실제로 그것을 덜 즐기게 된다. 오히려 예술 작품에 대한 전통적 반응 방식은, 그것이 예술 작품에 대해 타당성을 지니는 한, 감상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술 작품 자체로서 어떠하다는 사실에 대한 경탄의 반응이었다. 예술 작품에서 감상자에게 나타나 그를 매료하는 것은 예술 작품의 진리였다. 이러한 진리는 특히 카프카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는 다른 어떤 계기보다도 더 중요하다. 예술 작품들은 결코 고급스러운 향락의 수단이 아니었(37)다. 예술에 대한 감상자의 관계는 감상자가 그것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감상자가 예술 속에서 소멸했다. 이는 특히 영화 속의 기관차처럼 종종 감상자들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 같은 현대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어떤 연주자에게 음악이 기쁨을 주느냐고 물으면, 오히려 그는 토스카니니의 지휘를 받으면서 인상을 찡그리는 첼로 주자처럼 미국식 위트로 “음악이야말로 내가 증오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예술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 사람, 즉 예술 속에서 스스로 소멸하는 사람에게 예술은 객체가 아니다. 그는 예술에서 멀어지는 일을 견딜 수 없을 테지만, 예술의 개별 표현들은 그에게 쾌락의 원천이 아니다. 부르주아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술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예술과 관계없으리라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오늘 저녁에는 [교향곡 9번]을 들었으니 얼마만큼의 만족을 얻었다는 식의 결산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진실이 아니다. 그런데 이처럼 어리석은 생각이 어느새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부르주아들은 풍요로운 예술과 금욕적인 생활을 원한다. 아마 그 반대가 더 나을 것이다. 사물화된 의식은 감성적으로 직접적인 것 가운데 사람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감성적으로 직접적인 것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이 영역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겉으로 보기에 예술작품은 감성적 매력을 통해 소비자에게 밀착하지(38)만 실은 그에게서 소외된다. 즉 그것은 상품으로서 그의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는 그것을 잃어버릴 것을 끊임없이 걱정한다. 예술에 대한 그릇된 관계는 재산에 대한 불안과 유사하다. 예술 작품을 일종의 소유물로 간주하여 가질 수도 있지만 반성으로 인해 파손될 수도 있는 것으로 보는 물신주의적 관념은 예술 작품을 심리적 살림살이 속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재화라고 보는 생각과 엄밀하게 상응한다. 예술이 그 자체의 개념상 하나의 형성된 것이라면, 예술이 향락 수단으로 변한 것도 그에 못지않게 형성된 것이다. 물론 마술적이고 애니미즘적인 예술 작품의 전신들은 예배 활동의 구성 요소들로서, 예술의 자율성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처럼 성스러운 활동이었으므로 분명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술의 정신화는 문화로부터 배척된 사람들의 원한을 자극했으며, 소비예술이라는 장르를 초래했다. 반면에 이 소비예술에 대한 반감으로 예술가들은 더욱 가차 없이 정신화를 추구했다. 그리스의 나체 조각상들은 벽에 붙이는 미인 사진pin-up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지나간 것이나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현대 예술Moderne의 공감은 달리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예술가들이 탐스러운 자연 대상들로부터의 추상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도 ‘상징적 예술’을 구성하면서 태고 시대 예술이 지니는 비감성적 계기를 간과하지 않았다. 예술의 쾌락적 계기는 보편적으로 매개된 상품적 성격에 대한 항의로서 그 나름의 방식으로 매개될 수 있다. 즉 예술 작품에 몰입하는 사람은 언제나 너무 보잘것없는 생활의 초라함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쾌락은 도취로까지 고양될 수 있다. 그런데 향유라는 빈약한 개념은 이러한 도취에 도달하지 못한다. 향유 개념은 오히려 사람들이 즐길 줄 모르게 하는 데에 적합할(39)것이다. 한편으로 모든 미의 근거가 주관적 느낌이라고 집요하게 주장한 미학이 그러한 느낌을 진지하게 분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기이한 일이다. 그 느낌에 대한 서술은 거의 속물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마 주관적 출발점이 처음부터, 애호가의 즐거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품에 대한 관계에서만 예술 경험과 관련해 어떤 타당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을 은폐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 향유라는 개념은 예술 작품의 사회적 본질과 사회에 반대하는 본질 간의 저급한 타협이었다. 예술이 자체보존을 위한 활동에 아무 쓸모도 없는 한−부르주아사회는 이 점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적어도 예술은 감각적 쾌락을 모델 삼아 만들어진 일종의 사용가치를 통해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이로써 예술과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는 육체적 충족도 날조된다. 감각적 세분화의 능력이 없는 사람, 아름다운 음을 둔탁한 음과 구분하지 못하거나 밝은 색채를 흐린 색채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술을 경험할 능력이 없다고 전제된다. 예술 경험은 물론 고양된 상태로 감각적 세분화 상태를 형상화의 매체로서 받아들이지만, 이때의 쾌락을 단지 변형된 것으로서만 허용한다. 예술에서 그러한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변해왔다. 르네상스와 같이 금욕적인 시대 다음에 오는 시대에는 그것이 해방의 수단이었으며 활기찬 것이었다. 이 점은 빅토리아 시대에 반대하는 인상주의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때로는 성적 매력이 형식 속에 스며듦으로써 피조물의 비애가 형이상학적 사상내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계기가 강력하게 다시 등장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에서 굴절되지 않고 문자 그대로의 것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어떤 유치한 성격을 띠게 된다. 예술은 모사된 것으로서나 직접적인 효과로서가(40) 아니라 기억이나 동경 속에서만 그러한 계기를 흡수한다. 조잡한 감성적 요인에 대한 알레르기는, 쾌락적 요인과 형식이 좀더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도 있었을 시기들까지도 결국 소외시킨다. 사람들이 인상주의에서 멀어진 것은 무엇보다 그 때문일 것이다.(41)




ㅣ출처

미학 이론

테오도어 W. 아도르노 지음, 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5.

원제 : Asthetische Theorie




아도르노 [미학이론]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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