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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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인식’에 대한 기본자세라고 할 수 있다. ‘부정할 수 없는 것’, ‘진리’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 ‘명확한 인식의 조건’을 제시한다. ‘시간’이 그것이다. 칸트는 ‘역사성’을 인식의 핵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칸트는 인식이 ‘역사적인 것’이라는 논리까지는 가지 않는다.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칸트는 끝낸 것이다. 그걸 끝까지 밀고 가는 건 헤겔이고, 아도르노는 변증법 내지 헤겔 철학을 자의식에 도달하는 칸트주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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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 ‘변화, 발전, 생성’한다는 사실을 베르그송(생철학), 화이트헤드, 들뢰즈는 상당히 민감하게 옹호한다. 그들과 아도르노의 차이는 아도르노는 ‘개념을 통하지 않고는 사유가 전개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고, 그들은 ‘개념’을 쓰면서도 ‘개념’을 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변증법은 개념이 고정불변이 아니라 변화 발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변화 발전하는 대상에서 추상해서 뽑아낸 본질적인 것들(개념)을 실재 대상과 대질했을 때 개념이 틀리다는 것이 드러날 때 (개념을) 바꿔 간다는 것이다.
그처럼 개념과 대상 간의 대질을 통해서 변해간다는 것이 ‘내재 비판’이다. 대상에 대한 개념 구성 자체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대상과 대질하면서 그것이 드러내는 한계들을 밝혀 나가는 것, 자기가 주장하는 것과 실재 대상이 어떠한가를 대질하면서 틀렸는가. 맞는가를 끊임없이 따지는 것, 그렇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방법이 아도르노 나름의 인식 전략인 것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 대상의 전개 과정을 따라잡는 것인데 변화 구간을 따로 설정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인간의 인식 능력이나 인식의 필요성에 따라 더 빨리 그 한계가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유용하게 더 오래 쓰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가변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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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현실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곧 현실에 담겨 있는 모순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차이의 현상학과 성격이 다르다. 들뢰즈는 차이가 궁극적인 것이라고 보는데 아도르노는 차이를 궁극적인 것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헤겔이나 맑스가 모순을 근본적인 문제라고 봤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봤고, 사유틀 자체 내에서도 모순이 중요하지만 모순이 부각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다고 본다.
차이 나는 것들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유토피아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런 주장을 한다는 점에서 아도르노는 포스트모던 류와는 다른 인식론적 틀에 있다.
실존주의와 실증주의는 과학이며 기초 철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모든 철학의 기초를 자기들이 생각한다고 주장하면서 등장했다. 변증법은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기초 철학도 아니고 실증주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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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도 ‘역사성’을 이야기한다. 그때 역사성은 실제 역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공허한 추상이다. 변증법에서 역사적인 것은 구체적인 사실 자료들 하나하나에 대해서 그 역사적인 전개 과정을 따라잡는 것이다. 개별 인식과 기초 철학적 인식이 분리되는 게 아니다.
기초 철학은 따로 있고 그다음에 개별 과학들의 성과는 따로 있고 빈자리를 어느 한쪽이 서로 보완하고 이러는 건 아니다. 모든 개별 인식에서 그 역사적 과정을 따라잡아야 한다.
그러니까 역사 속에서 기존의 인식이 재조명되고 재평가된다는 측면이 하나, 그다음에 두 번째는 역사가 변하더라도 불변으로 남아 있다는 초역사적인 것, 그다음에 또 하나는 인식 그 자체가 그 안에 역사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는 것, 이 세 부류를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건 마지막 것이다. 인식 자체가 역사적이며 ‘시간적 핵’(Zeitkern)이다. 시간적 핵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타이밍(timing)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는 영원한 것이야. 그렇기 때문에 사태가 바뀌더라도 상관없이 이건 타당한 거야. 이런 것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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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지금은 이게 제일 핵심 사안인데 다른 허접한 거 가지고 어떻고 이러고 있어 봐야 핵심을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진리는 타이밍’이라는 느낌을 아주 절실하게 잘 보여주는 것이 레닌이다.
실제로 레닌의 글들은 그때그때 구체적 상황에 필요한 얘기들을 한다. 그 상황에서 절실하게 딱 필요한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서 앞에서 자기가 했던 얘기를 스스로 논박도 한다. 예컨대 비합법이냐 합법이냐 이런 것들을 놓고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의회가 필요하냐 안 하냐 의회 속에 들어갈 거냐 말 거냐 이런 것들에 대한 평가라든지 이런 것들은 다 구체적 상황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르게 언제라도 합법 필요하면 합법으로 하는 거고. 비합법이 필요하면 비합법으로 하는 거고.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이런 논리로 실제로 타협을 할 거냐 말 거냐 했을 때, 필요하면 당연히 한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타협을 안 한다. 이런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소리라는 것이다.
매 상황에 맞는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는 사고에서 ‘진리는 타이밍’이라는 얘기를 할 만하다. 그러니까 어떤 고정불변의 진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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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그것은 늘 맞는데 상황이 변하는 가운데 그 기능이나 역할이 달라질 뿐이다. 이렇게 보는 것도 아닌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얘기하는 게 맞지만 똑같은 얘기를 딴 데 가서 하면 틀리는 것이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타이밍이 안 맞는 것이다.
80년대 초에 국전에서 1등을 한 조각상이 있었다. 새 시대도 아닌데 군사독재고 엄연히 폭력 시대인데 그걸 새 시대라고 찬양하는 것을 금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거짓말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타이밍 맞춰서 나오는 거짓말인 것이다.
그런 것이 오늘날 나와봐야 의미가 없다. 진리와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다. 오늘날 나와봐야 별로 의미 없지만 그 시점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만 타이밍이 있는 게 아니라 거짓말도 타이밍이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원론적인 변증법에 대한 이야기와 그것들의 응용으로서의 역사 유물론, 이렇게 가르는 구분법은 아도르노론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 자체가 이미 역사적이며, 그 안에서 다뤄지는 모든 내용들은 전부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해야 하는 것들이다. 실재와 개별 과학, 응용과학과 원론 이렇게 나누는 사고 자체가 이미 엉터리인 것이다.
2023. 12. 10.
*위 글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번역자(홍승용)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