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진 Feb 09. 2024

이상을 세워갈 수도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질문을 마지막으로 받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그런 질문을 주고받은 기억은 있다. 받기도 했고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물음에서 ‘이상형’이라는 것이 ‘어디에도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만일 그랬다면 그와 같은 물음을 주고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물음에서 ‘이상형’이 의미하는 바는 ‘현실에서 가능한 만나고 싶은 사람’ 정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생각이 맞는 사람’ 정도였던 것 같다.

      



엥겔스는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이라는 글에서 ‘유토피아’와 ‘과학적 사회주의’를 구분한 바 있다. 양자가 의미하는 바는 다르지 않다.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 ‘계급이 사라진 사회’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엥겔스가 양자를 구분한 것은 그런 사회로 가는 방식에 있다. 그 방식이 과학적인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과학적인 방식’은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과 노동자계급의 투쟁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한계에 이르는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고, 노동자들이 국가의 주인이 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그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과정을 통할 때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현실을 지양해 가는 과정 없이 천재적인 사람들에 의해 어딘가에 세워지는 ‘유토피아’는 실현 가능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상태에 그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유토피아가 지속 가능하려면 누구나 그와 같은 유토피아의 주인이 될 정도의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엥겔스가 강조하는 것은 ‘과학적인 인식’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알아가면서 더 나은 쪽으로,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선되어야 할 것은 ‘과학적인 인식’이다.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유토피아에 이르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유토피아(Utopia)를 흔히 ‘어디에도 없는 곳’, 가 닿을 수 없는 ‘이상향’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아무 것도 없는 곳’, 황무지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잿더미 위에 세운 새로운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상향’이라는 곳도 황무지로부터 세워나갈 수 있다는 것일 테다. 다만, 엥겔스의 말처럼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실천’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상향이 어딘가에 있다면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말일 테다. 지난한 노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가능한 만나고 싶은 사람’, ‘이상형’을 이상향에 비추어 생각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나의 이상형인지 아닌지, 그 기준이 ‘외적인 조건’에 따른 것이라면 더 알아볼 것도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선은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알고 보니 이상형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실천적인 노력을 통해 그 사람을 이상형으로 세워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향도, 이상형도 ‘현실적 조건’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더라도, ‘현실적 조건’에 대한 ‘앎’과 ‘실천’을 통해 제약을 넘어 ‘이상’을 세워갈 수도 있을 것이다.          



2024. 2. 9.

매거진의 이전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