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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보기에?˝ 인생 진리 중 하나는 남들은 나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자신과의 투쟁이다. 10년을 여관방에서 시나리오만 쓴 영화감독,
기약 없는 무명 시절을 견딘 배우, 20년 습작 시간을 거쳐 마흔에 데뷔한 작가 - .
삶은 할 일로 채워지는 것이지 안정과 성취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 관념이다.
나는 조금 태평해지기로 했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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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는 신이 아니다. 과학자이기 이전에 자신의 정체성, 자기 연구의 의미,
자신이 속한 사회의 역사와 언어, 개인의 위치성을 알아야 한다.
동물들의 행위가 약육강식인지, 협력인지, 경쟁인지, 돌봄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잠깐, 백번 양보해서 여성의 모든 문제가 호르몬이라고 치자.
그것도 모두 출산력과 관련이 있다면 저출산 시대에 여성을 보호하고 지지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언제나 인간 문제는 ‘팩트’ 여부가 아니라 ‘팩트’를 만들어내는 권력에 달려 있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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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과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일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나는 열패감과 좌절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감히‘ 그가 부러웠다. 그는 해냈다. 그것도 아주 잘 해냈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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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전이 된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이나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모두 그들이 20대 중반에 쓴 작품이다.
자신이 피억압자라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해 사회운동에 헌신하면서
그 과정의 분노와 열정이 걸작이 된 경우다.
글쓰기의 목적이 사회 변화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글쓰기 자체가 사회를 다시 짓는 과정이다. 글쓰기의 목적은 결과에 있지 않다.
과정이 선하고 치열하면 결과도 그러하다. 글쓰기는 다른 삶을 지어내는 노동이다.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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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인 글은 쉬운 글일까? 아니, 대중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대중은 균질적이거나 실체적인 집단이 아니다. 모두가 만족하는 글은 가능하지 않다.
대중적인 글을 지향하는 것은 글을 못 쓰는 첩경이다. 안 되는 일을 어떻게 되게 하겠는가.
익숙한 말은 진부하게 여기고, 어렵다고 느껴지는 말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회가 창조적인 사회가 아닐까.
사회적 약자가 경험을 드러내면 ‘사소한’ 것인데도 불안하게 느껴지고,
가진 자의 논리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회에서 인간성은 어디를 향하게 될까.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107-109쪽)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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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책속에서_슬픔의 노래 (brunch.co.kr)
22화 책속에서_불교를 철학하다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