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고헤이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읽기
마르크스는 인간과 다른 생물들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만이 명확한 목적을 갖고 의식적인 ‘노동’으로
자연과 물질대사를 한다는 차이입니다.(23~24)
인간은 단순히 본능에 따라 자연과 관계 맺는 것이
아닙니다. 본능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노력은
다른 동물들도 합니다. 열대 아메리카에 사는
가위개미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나뭇잎을 잘라
둥지로 가져가 균을 심어 버섯을 재배합니다.
침팬지처럼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동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따듯해지려면 따뜻한 옷을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더 예쁜 옷’을 만들기 위해 염료로 옷을 염색합니다.
토기처럼 음식을 담을 그릇이 있으면 충분할 것 같지만,
제사나 예술 등 본능적인 욕구 충족 이외의 목적을 위해
인형을 만들기도 합니다.
인간만이 다른 생물보다 훨씬 다양하고 역동적인
‘자연에 대한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문화와
기술 발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는 순환적이며, 일방통행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쓰레기를 대량으로
배출하면, 미세플라스틱을 먹은 물고기가 우리 식탁으로
돌아옵니다. 또 화석연료의 대량소비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은 기후변화를 일으켜 우리 문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의 삶과 사회,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자연환경의
모습은 우리가 자연에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 작용 방식을 크게 잘못하면 사회와 자연은 황폐해집니다.
그래서 노동은 인간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매우 중요한 활동인
것입니다.(24~25)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가 ‘노동’이라는 개념에
주목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백일하에 드러내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물질대사라는 인간과 자연의
본원적 관계를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막연하게만 파악한다면 어느 시대든 인간은
자연과 물질대사를 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시대와 지역마다 크게 다르죠.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활동인 ‘노동’이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결정적 변화가 있음을 밝히고,
거기서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접근한 것입니다.(25)
[출처]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arte 2024, 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