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가장 절실하고 비밀스런 일에서 인간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말없이,
중얼거림 속에, 견뎌질 뿐이다. 그러나
이 견딤에서 내가 내 속의 나에게 닿아 있고
나 밖의 나에게 열려 있다면, 나를 둘러싼
세계에도 닫혀 있지는 않으리라. 오로지 이
눈먼 믿음으로, 이 믿음 속의 사랑으로 세계의
심연은 간신히 건너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광훈, 미학수업]
136
아름다움의 한 측면이 주관과 변덕, 불규칙과
부정형 그리고 자유와 정열로 되어 있다면,
또 다른 측면은 객관과 형식, 법칙과 질서,
책임과 이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요소만 있다면, 표현 이전의 것이므로
이해하고 전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두 번째
요소만 있다면, 주체의 자유로움이 없으므로
답답할 것이다. 그러니 주관과 객관, 자유와 책임,
감성과 이성에서는 그 어느 하나도 과소평가 되거나
무시돼선 안 된다. 모두 서로 어울려야 한다.
어울림뿐만 아니라 충돌하는 긴장 속에서 풍요롭게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문광훈, 미학수업]
137
부당한 일은 항의하고, 기쁜 일은 함께하며,
중앙보다는 변두리에 귀를 기울이고,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을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어떤 모순은 어떤 지점에서 ‘어찌할 바 없는 것’으로
그저 껴안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무엇도
신화화하지 않는 것, 그래서 사실 그대로 직시하고
이해하며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사랑하는
첫걸음이다. 이것이 미의 변증법이다.
[문광훈, 미학수업]
138
재앙과 복이 들어오는 문이 같듯이 불행과 행복은
서로 이웃한다. 아름다움 역시 환멸의 폐허에서
잠시 발견된다. 미인이 오늘 아름다운 것은,
그 미가 한때의 정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봄바람은 흐뭇하지만 오래가지 않기에 원망스런
것이기도 하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이런 모순
−이율배반의 흔적이 묻어 있다. 아름다움의
끔찍함을 함께 느끼지 못한다면(‘심미적 불능’이란
이것이다). 그것은 거짓이다. 치장된 아름다움은
거짓 행복이다. 참된 아름다움은, 이 아름다움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모든 부정적인 것을 꿰뚫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답지 못한 것을 관통하고
견디고 끌고 가지 못한다면, 아름다운 것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문광훈, 미학수업]
139
예술은 다른 현실,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요 창이며 입구이자 교차로다. 시와 그림과
음악이 발산하는 분위기는 우리를 언제나
다른 영역으로 데려다 준다. 그곳은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세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더
넓고 깊으며 더 평화로운 곳이다. 혹은 더
끔찍하고 기괴한 곳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심미적 충격을 통해 우리는, 어떻든,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문광훈, 미학수업, 8]
140
나날의 일상은 지루하게 되풀이된다. 그래서
감각은 무뎌지고 둔해진다. 예술은 이 무뎌져 가는
감각을 쇄신시켜준다. 거기에는 언제나 색다른
무엇이, 기존과는 다른 사람과 사연과 풍경이
나오기 때문이다. 시나 그림, 음악이나 영화
가운데 어떤 것이 우리를 뒤흔들지 않을까.
좋은 예술작품은 예외 없이 해묵은 감각을
쇄신시킨다. 타성에 적은 감각의 갱신
−감각의 쇄신은 곧 생활의 쇄신이다.
[문광훈, 미학수업, 8]
141
감각의 쇄신은 사고의 쇄신으로 이어지고
사고의 쇄신은 언어의 쇄신으로 연결된다.
생각은 말로 표현될 때, 더 분명해진다.
감각이 사고로 이어지고, 이 사고가 언어로
규정될 때, 감각은 자신의 집을 갖는다.
일기를 적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건
떠다니던 인상과 경험들이 제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글쓰기란 느낌과 생각에 어울리는
자리를 정해주는 일이다. 그렇듯 예술은 감각과
사고에 ‘물길을 대는’ 일−수로화 작업에 비슷하다.
[문광훈, 미학수업, 9]
2024. 4.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