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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 자체에 다가갈 자유

by 영진

사태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저는 제대로 파악하겠다는 자유의지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럴 자유의지가 없는데 제대로 파악할 리 없을 것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파악했다는 것의 의미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대로’ 파악했다는 것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파악한 것이 가장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각자가 파악한 ‘제대로’가 서로 충돌하는 일은 비일비재할 것이며 불가피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사태 자체’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만 난무하는 ‘사태’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그러한 사태가 ‘사태 자체’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기 주장이 곧 사태 자체와 동일시 되기도 하고, 사태 자체는 알 수 없다거나, 사태 자체라는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태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아도르노는 ‘사태 자체에 다가갈 자유’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계급의 사유가 지배적인 사유’라는 말처럼* 비非지배자들에게 사태 자체에 다가갈 자유는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자의식적으로 자유를 의지할 때 자유로울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비지배자들의 경우 사태 자체에 다가가려는 자유의지를 통할 때 지배자들이 형성하고 있는 사태 자체를 의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도르노가 주장하는 변증법적 사유는 ‘자유를 억압하는’ 사태 자체를 제대로 사유하려는 ‘자유를 위한’ 운동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자유로운 사유 운동을 통할 때 비지배자들에게 자유로운 사태 자체가 형성되기도 할 것입니다.




‘제대로’라는 말에는 ‘마땅하고 알맞은 정도로’(한국어 사전)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사태 자체를 제대로 사유한다는 것은 이미 형성되어 있고, 또한, 지금 형성하고 있는 ‘사태 자체’가 ‘마땅하고 알맞은 정도’인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고 여깁니다.


‘사태 자체’와 ‘사유’의 일치나 정합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사태 자체가 비지배자들에게 ‘마땅하고 알맞은 정도인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사태 자체에 대해 제대로 사유한다는 것은 사태 자체를 지배-비지배와 같은 지배관계에 따른 억압이 없는 자유로운 사태 자체에 다가갈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여깁니다.


지배계급의 지배적인 ‘사태 자체’를 제대로 사유하기 위한 자유가 지배적인 사회 질서라는 사태 자체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억압 당한다면, 즉, 사유할 자유마저 억압 당한다면 ‘사태 자체’에 대한 제대로된 사유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그 자유는 부단히 ‘사태 자체’에 다가가려는 자의식적인 자유의지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칼 맑스의 ‘한 사회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인용. ‘사상’을 ‘사유’로 필자 씀.



2024. 5. 4.



<대문사진> 독일 베를린에서 영진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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