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생존에 적합한 종種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게 되고 부적합한 종은 멸종한다’. 그와 같은 ‘진화론’에 따라 사회적 진화론자들은 ‘경제적 자유방임, 제국주의, 인종차별, 민족 우월주의, 군국주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한다.
우리는 정복하는 민족이다. 따라서 우리는 피에 복종하여 필요하다면 새로운 영토를 점령하고 새로운 시장을 빼앗아야 한다.(미국의 의원 비버리지)
전쟁은 가장 본질적인 생물학적 욕구이다.(프러시아의 장군, 베른하르디, 《독일과 다음 전쟁》)
유럽인들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지적 및 도덕적 자질에서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 야만생활을 하던 유럽인들을 오늘의 문화와 진보로 이끈 그 능력과 힘이 야만인을 정복하고 자신의 수를 늘어나게 하였다.(월리스 1864)
진화론적인 종의 특성에 의한 것인지, ‘한 사회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칼 맑스, 독일이데올로기)이어서 그런 것인지, 실제로 인간 종의 역사에서는 사회적 진화론자들의 정당화가 정당했고 지금도 그러해 보인다.
한데, 인간의 역사에서 지배적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성, 평등, 휴머니즘, 세계시민주의’를 주장하며 그에 따른 사회를 실현하려던 인간 종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칸트는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인정한다. 그는 ‘인륜성, 세계시민주의, 영구평화’와 같은 ‘사회적 진화론자들’과는 상반되는 주장을 한다. 자신의 주장이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세계시민들의 ‘요청’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현실에는 그처럼 이율배반적인 두 세계가 ‘공존’한다고 파악했다.
헤겔이나 맑스는 두 세계가 ‘이율배반적인 공존’관계가 아니라 ‘모순’관계로 파악한다. 그런 점에서 칸트와 달리 ‘진화론’적인 입장에 가까워 보인다. 그들도 칸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사회(계급 없는 사회)를 주장하지만, 칸트처럼 ‘요청’이 아니라 사회적 진화론자들처럼 ‘자본권력’과의 생사를 건 경쟁(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가능한 사회라고 주장한다.
아도르노도 칸트나 헤겔, 맑스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사회(유토피아)를 주장하지만 현실을 이율배반적이 아니라 모순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칸트가 아니라 헤겔이나 맑스의 입장에 가깝다. 다만, 모순의 바다를 건너 유토피아로 가는 방식에서 ‘요청’이나 ‘투쟁’과는 또 다른 모델을 제시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면서도 서로 어우러져 별자리를 이루는’ ‘짜임관계’로서의 유토피아가 그것이다. 생존경쟁을 하더라도 도태되는 종(비동일자)을 배제하지 않으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이 얼핏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보다 좀 더 ‘자율적이면서도 포괄적’이라고 해야겠다. 아도르노 자신이 서로 다른 것들이 존중하고 사랑하며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다.
다윈의 진화론을 따르는 사회적 진화론자들이나 헤겔, 맑스에게서 ‘평등한 사회’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오직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진화), ‘생사를 건 투쟁’(헤겔)이나 ‘끝장을 보는 전쟁’(맑스)의 과정에서 생존하거나 도태하는 종이 있을 뿐인 것은 아닌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홉스)이 있을 뿐인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맑스와 엥겔스는 유토피아주의를 비판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산력 증대’를 전제한다. 그들은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생산력이 증대하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사회주의적인 생산양식으로 대체해야 하는 때가 온다고 본 것이다.
그 때는 노동자들이 자본권력과의 계급투쟁(생존경쟁)에서 승리하는 때일 것이다.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이 되어야 그들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이 되어, 혹은,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이 되기 위해서, 자본권력과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하여, 승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도태되는 종도 배제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 때가 그 때일 것이다.
나는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에서처럼 ‘유토피아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의 구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 둘은 결과로서 드러날 것이며 그 과정에서는 아도르노가 주장하는 ‘사태 자체’에 대한 촘촘한 ‘미시론적’ 사고가 중요할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론에서는 ‘노동자’(계급)가 계급투쟁 혹은 생존경쟁의 주체이지만 나는 ‘노동자, 시민, 국민, 주민’ 중 누가 주체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여긴다.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노동자이면서 시민이면서 국민이면서 주민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이 세상 하나뿐인 ‘나’이기도 하다.
2024. 11. 15.
*‘진화론’ 관련 내용은 <이야기 세계사2>(이구학, 청아출판사, 2006)의 ‘진화론’ 장에서 옮김.
*사진들 - 독일 베를린. 영진 찍음. 본문1-브란덴부르크 토어. 본문2-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