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지마에 따르면 ‘동일화 전략’은 어떠한 반대도 참고 보지 못하는 독백을 산출한다. 독백은 곧 현실 자체인 것이다. 히틀러처럼 자기를 현실이나 진리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이의를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어리석고’ ‘뻔뻔스런’자들(예컨대 평화주의자들)만이 자기 생각에 반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이데649)
이처럼 독백적 술화는 “반대파의 입을 틀어막는 독재자의 태도와 비슷하다”(이데649-650) 이러한 독백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특징을 지니는 술화는 “대상의 인식과 대화를 촉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방해”(이데476)한다.
결국 독백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자신을 완전한 현실이라고 자처함으로써 “개인과 집단을 특정한 술화적 도식 속의 주체로서 동원하고 경쟁적인 이데올로기들의 진리 요구를 제압”(이데428)하려고 한다.
한편 페터 지마는 히틀러를 술화 구조의 산물이라고 판단한다. 히틀러 같은 인물의 등장은 1차 대전 당시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 국가들의 학교에서 권위적이고 독백적인 술화가 지배적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페터 지마는 그러한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서 술화 간의 대화를 제안하며 그 중에서도 이질 집단 간의 대화를 진정한 대화로 본다. 이질 집단 혹은 술화 간의 대화만이 진정한 대화라는 것이다.
“주체와 대상의 거리를 점진적으로 좁혀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독백적인 정의가 지니는 특수성과 자의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질적인 술화 간의 대화다. 이로써 이질적인 대상 구성이 서로 비교되고 대상에 대한 점근적인 접근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이데650)
그에 반해 페터 지마는 동질 집단 혹은 술화 내부의 대화는 ‘위장된 독백’이라고 비판한다.
“예컨대 어떤 이론적 정리(가설)가 정신분석학이나 비판적 합리주의, 또는 알튀세르주의 진영 내부에서 간주관적으로 검증된다고 하자. 이러한 주체 간 검증이 과연 진정한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각 집단 내에서 통용되는 근본 원칙을 재확인하거나 기껏해야 다소 변형시키는 데 지나지 않는 사이비 대화, 위장된 독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 나는 단일한 사회어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이론적 대화(간주관성)란 위장된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이질적인 집단적 입장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진정한 대화의 경우에는 더 이상 간주관성과 같은 개인주의적 기준이 통용될 여지가 없어진다.”(이데651)
정치, 경제, 법, 종교, 언론, 대학 등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위장된 독백’과 담합을 넘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이러한 술화구조는 사회 전체가 침묵하도록 강요한다. 해서, 대화의 요구, 진리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계속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기득권자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런 구조를 변화시키는 일도 마찬가지다. 말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서 충분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시작인 셈이다. 그런 대화의 과정을 생략하고 소수 당하는 자들이 기득권자들과 마찬가지로 폐쇄적인 술화를 통해 사회를 바꾸겠다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안타까운 실험에 그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밀폐된 술화의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간다. 동질 집단 내에서도 합의가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으며 설사 ‘위장된 독백’이라고 비판받더라도 내 편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동질 집단 내의 대화가 훨씬 편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굳이 이질 집단과의 대화에 적극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역시 진리를 위해서이겠다. 밀폐된 술화는 그들에게 현실의 대체물이자 개인적 집단적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받침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람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맹목적 광기는 밀폐된 술화에서 경험적이고 대화적인 검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론적 술화는 사실이나 사건들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어느 때라도 경험적 검증과 대화적 검증을 허용하는 개방적 형태를 취해야 할 것이다.
2015. 5. 26.
-페터 지마, 이데올로기와 이론, 허창운·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