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주체생활’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주체적인 생활’을 위해서 ‘좋은 삶’, ‘평등한 삶’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좋은 삶’, ‘평등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일깨워주는 것은 중요해 보인다. 사회 곳곳에 ‘좋은 삶’, ‘평등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과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은 ‘위험한 세상’의 ‘완충지대’로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사는 ‘좋은 사회’를 향해 가는 교두보가 되어 줄 것이다.
국어 교사인 서현숙 선생님이 소년원에서 소년과 함께 국어 수업을 했던 경험을 쓴 책 <소년을 읽다>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대목이 있다.
“아, 사람과 이런 관계를 맺을 때 기쁘구나. 다른 이에게 음식을 대접하면 나도 이렇게 기분 좋아지는구나. 다른 사람에게 기대와 인정을 받을 때 더 잘하고 싶어 지는구나. 뮤지컬을 보고, 미술 작품 전시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구나. 친구들과 같이 스포츠를 즐기고 나면 기분 좋은 에너지가 생기는구나. 내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할 때 뿌듯하구나. 내가 읽은 책의 작가를 직접 만나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즐거운 일이구나. 뭐든 구경만 할 때보다 내가 직접 참여할 때 훨씬 보람 있구나.”
“나도 좋은 삶을 살고 싶다. 소년이 이런 삶을 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사회와 사회의 어른들이 소년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욕망이 가는 길을 바꾸는 것이 최고의 교정·교화가 아닐까. 소년이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좋은 삶을 욕망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소년원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사람’ 답게 사는 삶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우리가 ‘사람’ 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나도 좋은 삶을 살고 싶다’는, 좋은 삶을 원하도록 ‘욕망이 가는 길을 바꾸는 것’,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좋은 삶을 욕망하게 하는 것‘, 사회와 사회의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어른일 것이다.
좋은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삶을 욕망하게 하는 좋은 사회는 ’ 슬기로운 주체‘들이 자의식적으로 ’ 좋은 사회‘, ’ 평등한 사회‘를 만들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할 테다.
칼 맑스는 ‘인간’과 ‘욕망’과 ‘세계’에 대해, 그들의 관계에 대해, 그들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주체적인 행위에 대해 다음과 쓰고 있다.
“인간인 한에서의 인간과, 인간적인 관계인 한에서의 인간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전제하면, 당신이, 예를 들어 사랑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며, 신뢰를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신뢰뿐이다. 예술을 즐기고 싶으면 예술적인 교양을 쌓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으면 실제로 격려하고 원조함으로써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태도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성적인 삶의 특정한 표출, 더욱이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어울리는 표출이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하면서 짝사랑으로 끝난다면, 즉 당신의 사랑이 사랑으로서 상대방의 사랑을 낳지 못하고,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의 표출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력하고 불행하다.”
서현숙 선생님과 맑스의 주장처럼 인간이 ‘자기 욕망의 주인’으로서,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대로 ‘좋은 사회’, ‘평등한 사회’를 만들며 살아갈 때 ‘슬기로운 주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슬기로운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에는 주체들의 삶을 규정하는 물적 토대로서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다른 생산방식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 ‘자본국가’를 ‘노동자국가’로 대체해 가는 것은 ‘슬기로운 주체’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것이다. 생산방식을 변화시키는 만큼, 노동자국가로 대체하는 만큼, 그만큼 ‘좋은 사회’, ‘평등한 사회’를 살아가게 될 테니까 말이다.
*“ ” 인용은 서현숙, <소년을 읽다>, 사계절 2021, 에필로그 / K. 맑스, <경제학⋅철학초고>, 김문현 역, 동서문화사 2014, 158쪽.
2023.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