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도시농부를 꿈꾸며 준비 중이라던 도시청년을 만났다. 채식을 하고 있었고 채식주의자라고 했다. 나 역시 채식주의자‘였다’고 했고 그와 좀 더 가까워짐을 느꼈다. 그는 나에게 왜 계속 채식주의자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채식을 ‘지향’한다고 나는 답했다.
나는 좀 그런 편이다. ‘지향’은 잘하는데 강한 신념은 잘 없다. 아무 주의자도 아닌데 어떤 주의자인 이유일 것이다.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뜨끔했던 것은 그 청년은 채식을 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나의 채식의 역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채식은 주변의 몇몇 사람들 때문에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이었고 주변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5년 정도 채식주의자라고 할 만큼 채식을 했고 그중 2년 정도는 유제품도 먹지 않는 비건이었다.
채식이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좋았다. 어릴 적부터 육식을 많이 하지 않아서인지 채식을 해도 몸이 불편하지 않았다. 몸이 육식을 원할 때도 있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힘든 건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별나게 왜 그러니. 몸에 병이라도 있니. 그 맛있는 고기를 왜 안 먹니. 나 역시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왜 채식을 하느냐고 물으면 하고 싶어서 한다고 답하고 권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를 자처하며 공부도 하고 주변에도 권하던 한 친구 덕분에 채식주의에 대해서 같이 고민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왜 채식을 하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답을 찾아주고 있었다. 나 역시 결식아동을 돕던 그 친구의 채식의 이유가 궁금했다.
그 친구는 심각해했다. 기업들이 소를 대량으로 사육해서 곡물과 물이 부족해지고 숲이 사라지고 환경이 파괴된다. 소를 잔인한 방식으로 가공해서 판매한다. 그 친구는 소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동물들의 고통을 이야기했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겠다. 살생을 하지 않겠다. 그 친구가 채식을 하는 이유는 생명과 환경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다.
비아냥에 가까운 반응들이 따라다녔다. 그런다고 환경이 보호되나 기업들의 산업폐기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죽이는 게 살생이지 죽은 것을 먹는 건 살생이 아니지. 생선이나 식물을 먹는 건 살생이 아닌가. 채식하려면 돈과 시간이 많이 들 텐데 여유 있나 봐. 환경 보호하려면 차도 없애야지.
주변이 그럴수록 그 친구는 채식운동가에 가까워졌다. 직접 채식요리를 개발하며 채식식당들을 찾아다녔고 유명한 채식주의자들을 알아내어 주변에 알리기도 했다. 몸도 정신도 더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 사이 나는 비건은 아니기도 했다가 생선은 먹는 反육식주의이기도 했다가 지금은 ‘소’는 거의 먹지 않는 대체로 ‘채식지향자’로 흐르고 있다.
시간이 흘렀고 이제 환경이 아니라 동물이 아니라 채식이 아니라 건강한 먹거리가 아니라 식량이 아니라 농촌 소멸과 인류 존망을 걱정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기업은 이윤추구를 위해서 개발과 성장을 멈추지 않을 테니 앞으로도 땅과 물은 오염되고 환경은 파괴될 것이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니 친구야. 기업과 국가는 늘 하던 대로 하겠지. 우리도 늘 하던 대로 더 힘껏 우리의 생명을 보호해야겠지. 늘 하던 대로 환경과 농촌과 땅과 물을 보호하고 있는 이들에게 연대의 손과 마음도 보내야겠지. 채식주의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서 몇 글자 남긴다.
2021. 11. 8.
2021년에 쓴 글이고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와 기후 재난으로 인해 망가져 가는 바다와 땅에 대한 염려에서 생각나서 올린다. 도시농부를 꿈꾸던 그 청년에게 응원의 마음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