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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들은 왜 권위주의 정권에 쉽게 굴복하나

by 영진

현대 국가에서 법원은 정의의 보루로 여겨진다. 권위주의적인 행정부 수장이나 의회 다수파의 횡포로부터 시민의 기본권을 지켜낼 최후의 방파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에는 판사들이 이 같은 기대를 저버리고 억압적 정권의 도구로 전락한 사례가 흔하다. 노르웨이 법학자 한스 페터 그라베르가 쓴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은 ‘권위주의 정권에서 왜 판사들이 정의를 배반하고 불의와 타협하는가’라는 질문을 파고들어간 연구서다.

저자는 나치 집권기 독일, 나치 점령 시기 일부 유럽 국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시기 남아프리카공화국, 군부 독재 시기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 등의 사례들을 분석한다. “법치주의에 헌신해오던 사법관행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진 경우들이다. 민주적 법질서가 강압적 권력에 의해 붕괴되거나 크게 제약돼 ‘순응’이냐 ‘저항’이냐는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판사들은 대부분 순응하는 편을 선택했다.

저자는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제도적 안전장치는 없다고 본다. 결국은 개인의 도덕적 결단에 기댈 수밖에 없다. 저자는 미국 항소법원 판사 러니드 핸드(1872~1961)의 발언을 인용한다. “자유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 자유가 그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리면, 어떤 헌법이나 어떤 법도, 어떤 법원도 그것을 지켜낼 수 없다. 그것을 되살리는 데조차 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가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 있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헌법이나 법도, 법원도 필요하지 않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을 지낸 번역자 정연순 변호사는 ‘역자 후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다면 우리 공동체는 어떻게 그러한 판사를 길러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며 “이런 어려운 질문을 외면하고 쉽게 떠오르는 해결책에 매몰된다면, 우리는 사법부의 역할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때 오히려 불의와 타협해 국민과 정의를 배신하는 법복관료들에게 휘둘리는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2025. 5. 2. 기사 <판사들은 왜 권위주의 정권에 쉽게 굴복하나> 중에서



판사들이 왜 그럴까. 현대 국가에서 판사들이 “억압적 정권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는 "정의의 보루", "시민의 기본권을 지켜낼 최후의 방파제"일 수 있을까.


그 물음에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제도적 안전장치는 없다” “결국은 개인의 도덕적 결단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견해에 대해,


“사법부의 역할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때 오히려 불의와 타협해 국민과 정의를 배신하는 법복관료들에게 휘둘리는 존재로 남”지 않기 위해, 번역자는 ‘‘역자 후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다면 우리 공동체는 어떻게 그러한 판사를 길러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쓰고 있다고 기사는 전한다.




자본이 독재하는 현대사에서 ‘국가와 법’은 자본의 집행기구일 수밖에 없다는 레닌이나 루카치의 견해처럼 저자가 다다른 결론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견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정의로운 판사를 길러낼 것인가'가 아니라, ‘정의로운 판사를 길러낼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일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 독재에 쉽게 굴복하지 않을 ‘국가’, 혹은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할 것이다.



2025. 5. 3.



[책과 삶] 판사들은 왜 권위주의 정권에 쉽게 굴복하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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