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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판결에 부합하려는 것으로 보일 때

by 영진

현대 국가에서 법원은 정의의 보루로 여겨진다. 권위주의적인 행정부 수장이나 의회 다수파의 횡포로부터 시민의 기본권을 지켜낼 최후의 방파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에는 판사들이 이 같은 기대를 저버리고 억압적 정권의 도구로 전락한 사례가 흔하다. 노르웨이 법학자 한스 페터 그라베르가 쓴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은 ‘권위주의 정권에서 왜 판사들이 정의를 배반하고 불의와 타협하는가’라는 질문을 파고들어간 연구서다.

저자는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제도적 안전장치는 없다고 본다. 결국은 개인의 도덕적 결단에 기댈 수밖에 없다. "자유가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 있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헌법이나 법도, 법원도 필요하지 않다.”


-경향신문, 2025. 5. 2. 기사 <판사들은 왜 권위주의 정권에 쉽게 굴복하나> 중에서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제도적 안전장치는 없다고 본다. 결국은 개인의 도덕적 결단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결론에 동의하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렇다면 당장 지켜지지 않는 법에 의해, 혹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고통을 받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어가는 국민들은 어찌해야 하는가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근로기준법’, ‘중대재해처벌법’이 있지만 입법(법률화)하고 사법하고 행정하는데 공정하고 정의롭게 지켜지는지 의문을 갖게할 만큼 ‘중대 재해’로 고통을 받거나 목숨을 잃는 국민들의 소식을 매일 접하게 된다.


또한,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제한이나 노동자인데도 노동자의 범위에서 배제되는 노동자들(간접 고용, 특수 고용, 미등록 이주 노동자 등)을 보호하기 위한 노조법 개정은 대단히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저자의 바람대로 개인들의 도덕적인 결단에 따라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까지는 아니더라도 법이 권력의 도구가 되지 않는 사회는 개인들이 만들어 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에 한국에서 논란인 대통령 후보에 대한 ‘파기환송’이라는 판사의 판결에 대해서도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판결(정치 개입, 선거 운동)이라는 의문과 문제 제기가 있다.


유죄였다가 무죄였다가 다시 유죄가 되기도 하듯이 판사들 사이에서도, 법리 해석, 권력과의 관계, 개인의 도덕적 결단에 따라 판결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처럼 가변적인 판결에 대해 주권자 국민들이 의문을 품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법원 규정*과 달리 판결이 2년 6개월로 지연된 이유가 권력의 이익에 부합하는 때에 맞춰 판결하기 위한 때문이 아닌가는, 어차피 지연된 판결이 더 지연된다고 무슨 문제인가라는, 번복된 판결로 야기된 판결의 공정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더 신중한 판결이 필요하지 않은가는 의문들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권력과의 관계’, ‘법리 해석의 다양성’, ‘개인의 도덕적 결단’에 따라 판사들의 판결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 판결이 국민들의 눈에 공정한 판결에 부합하려는 것으로 보일 때 사법부의 ‘권위와 신뢰’는 지켜질 수 있을 것이다.



2025. 5. 6.



*”이번 사건 1심은 공소 제기 후 약 2년2개월 뒤 선고됐고, 항소심 결과는 1심 판결 선고일로부터 약 4개월 후 나왔다. 대법원 규정상 선거법 사건은 1심은 공소 제기 후 6개월 이내에, 2·3심은 전심으로부터 3개월 이내에 결론을 내도록 돼 있다.“(아래 기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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