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내가 지구에 온 목적은 없었다. 그러니 물, 바람, 공기, 햇빛, 나무처럼 있는 그 자체가 목적인 그들처럼 있다 흙으로 돌아가면 그뿐이고 싶다. 하지만 인간으로 지구에 온 것이라 그들이 될 수는 없는 것이고 인간처럼 있다 가야 할 수밖에 없어졌다. 물도 바람도 공기도 햇빛도 나무도 아닌 인간의 목적은 뭔가.
지구는 인간에게 인간의 자격을 요구한다. 그것이 인간의 목적일 수도 있겠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한 자격 말고 ‘인간’으로서의 자격. 감히 인간이 인간에게 그런 자격을 부여할 수 있을까. 神이나 자연의 섭리를 따르면 되려나. 아니면 자신의 양심에 따르는 수밖에 없으려나.
인간으로서 내가 지구에 온 목적은 양심에 따라 자신다운 인간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남들 보고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자기부터 자기라도 자기는 그렇게 살 일이다. 자기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이 삶이기도 하니까. 목적 없이 산다는 합목적적인 삶까지 포함해서.
자기 목적에 따라 살더라도 타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혼자 사는 지구가 아니니. 물론 우리 누구도 타인이 되어 본 적도 없고, 될 수도 없지만 타인 없이 자기도 있을 수 없으니 자기를 위해서라도 타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를 배려하고 싶다면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함께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악셀 호네트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을 망각하는 이유들 중 하나로 목적 망각을 말한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자기 목적만 생각할 때 상대방에 대한 인정을 망각한다고 말한다. 가장 친한 친구와 재미 삼아 테니스를 치다가 승부욕에 집착하여 관계를 해치는 경우를 말한다.
대기업의 목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노동자들을 기만해서 이윤을 추구하고 자본을 증식하는 것이다. 지구에서 물이나 공기, 흙만큼이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자기 목적을 망각할 일은 없어 보인다. 자기 목적을 망각하는 순간 더 이상 자기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중요한 목적일 것이다. 자연재해를 비롯한 각종 위험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삶을 위협하는 대기업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해 주는 것도 국가의 목적이다. 대통령, 국회의원, 지식인뿐만 아니라 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도 국민이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국민들도 있다. 국가가 자기 목적을 망각할 때 국민은 국가의 목적을 의심하게 된다.
물, 바람, 공기, 햇빛, 흙뿐만 아니라 지구에는 인간이 존재하고 자기가 존재하고 타인이, 대기업이, 국가가 존재한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적을 가지고 존재한다. 때론 자기 목적을 망각하면서 말이다.
2021.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