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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고 유쾌하게

by 영진

늘 배후에서 그리고 종종 전면에서 이 모든 것을 추동한 요인들은 발견하고 개발하는 기업 연구소, 그 결과물을 발전시켜 활용하는 대기업, 이 모든 활동들을 조정하는 세계화된 시장경제였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시장경제는 해결책이라기보다 문제에 더 가까웠다. 시장경제는 오로지 재산권만을 인정한 반면, 사람들은 폴라니적 권리를 원했다. 즉 자신을 지원하는 공동체에 대한 권리,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는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소득, 꾸준한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제적 안정 등을 원했다. 장기 20세기 동안 성취한 경제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유토피아 건설에 있어서 물질적 부가 전부는 아니었음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지만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바로 “지혜롭고 유쾌하게 잘 사는” 방법이야말로 인류의 영구적인 문제라는 케인스의 말이 다시 절실히 떠오른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모든 개인의 생득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네 가지 자유가 있으니, 의사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였다. 이 중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만이 물질적 부를 통해 보장된다. 나머지는 다른 수단을 통해 확보해야 한다. ‘시장이 주시고 시장이 가져가시는’ 작용은 다른 욕구와 필요에서 나오는 희망과 두려움에 가려질 수 있고 실제로 종종 가려진다.




느리게건 질주해서건 경제적인 개선을 이루어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도 충분한 양 이상−충분한 것 이상의 칼로리, 주거, 의복, 유형의 재화 등−을 이루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이루어내면, 비관론자들이라고 해도 웬만해서는 포기하기를 꺼려한다. 그리고 어떤 생각은 한번 머리에 떠오르면 잊기 어렵다. 유용한 인간 지식의 글로벌 가치를 나타내는 양적 지수의 알려지지 않은 이점이 여기에 있다. 이 지수는 복리로 증가한다. 그 생각들 중에는 ‘주신 분도 시장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시장이시니. 시장의 이름으로 찬양하라’는 것도 있고, 마찬가지로 ‘시장이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인간이 시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것도 있다. 나도 다음을 덧붙이고 싶다. 종종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기 때문에, 정부는 때때로 무거운 손길로 관리하고, 유능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미 1919년에 케인스는 인류가 이미 “다른 시대의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군주들 조차 손에 넣을 수 없었던 편리함과 안락함”을 생산할 힘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강조했지만, 그것의 향유는 여전히 상류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19세기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2010년의 인류가 가진 기술적·조직적 능력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곧 다음 질문을 내놓을 것이다. 이렇게 자연을 조작하고 인간 스스로를 조직하는 데에 신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우리는 진정한 인간 세계를 건설하고 여러 유토피아 중 어떤 것에든 가까이 가기 위해 이룬 바가 거의 없는 것인가?




2010년경 미국의 패권국 역할에 대한 불신은 중동 지역에서의 잘못된 모험으로 인해 더욱 굳어졌다. 성장을 촉진하지도 못하면서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폭발하자 불만이 늘어났다. 2008~2010년의 대침체는 신자유주의 테크노크라트들이 경제 관리의 문제를 마침내 바로잡았다는 주장이 얼마나 공허한 헛소리인지를 폭로했다. 북방세계의 정치 기구들은 기후위기라는 문제에 대해 고민조차 시작하지 않았다. 생산성 성장의 근간이 되는 엔진은 멈추기 시작했다. 북방세계의 훌륭하고 선한 이들은 완전고용의 조속한 회복을 우선 과제로 삼는 일에 실패했으며, 네오파시즘 및 파시즘에 근접한 극우 정치인들이 201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만든 사람들의 불만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일에도 실패했다.


이렇게 하여 장기 20세기의 스토리는 끝이 났다. 어쩌면 2010년에 끝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클린턴 정부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상상했던 미래−당시의 정책들이 계속될 수 있다면 정보기술 호황이 앞으로 치고 나가면서 공평하고 빠른 경제성장이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생각−는 애초부터 환상이었던 것 같다. 혹은 우연과 우발적 요인들이 다르게 전개되었다면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2008년에 미국이 프랭클린 루즈벨트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더라면, 1933년과 그 이후에 기적을 일으켰던 것처럼 그(또는 그녀)가 기적을 이루어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2016년에도 생산성 성장, 그 생산성 성장이 세계에 가져올 창조적 파괴의 변화를 관리할 수 있는 정부, 그리고 미국 예외주의라는 장기 20세기의 패턴의 건조한 뼈대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10년 이후의 미국은 되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서유럽도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소생의 가능성은 종언을 고했다.


이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거대 내러티브가 필요한 새로운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 브래드퍼드 들롱 지음, 홍기빈 옮김, <20세기 경제사> 659-668쪽.



2025. 6. 19.




[출처] 20세기 경제사 - 우리는 유토피아로 가고 있는가

브래드퍼드 들롱 지음, 홍기빈 옮김, 생각의힘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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