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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서 공감하는

by 영진

“오은의 시는 일상적 언어의 사용을 넘어선 한국어 감각을 체험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언어적 차이로 인해, 이 감각을 되살리는 데 번역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었다.” 나는 더 나은 번역이, 나아가 더 좋은 창작이 이 ‘겸허함’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믿는다. 겸허함은 사람을 신중하게 하고 ‘차이’를 어떻게 좁힐지 궁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때마침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번역대학원대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문학에의 관심이 부쩍 늘어난 요즘, 이해와 공감으로 차이를 메우고 이를 창의적으로 전달하는 번역가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번역가의 손때가 묻은 번역, 최적의 단어를 고르고 뉘앙스를 고려하는 번역, 낱낱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는 번역이 양질의 번역일 것이다. 번역 덕분에 우리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고 낯선 사회를 경험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뒤에는 데버라 스미스가, 김혜순의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 뒤에는 최돈미가 있었다.


번역대학원대학교 설립과 관련해 정책토론회도 열린다고 한다. 제목은 ‘문학번역의 미래-AI시대 인간번역의 가치’다. 기계번역의 효용성이 아니라 인간번역의 가치를 논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번역이 단순히 ‘문장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책 한 권에 담긴) ‘삶을 통째로 옮기는 일’임을 상기해야 한다. AI는 잘하고 싶은 마음, 여기의 맥락을 거기의 상황에 걸맞게 옮기려는 의지, 잠재된 의미를 발생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 넘어야 할 언덕이 여럿 남았겠으나 첫발을 뗐으니 속도를 내주었으면 한다. 빼어난 한국문학 작품들이 더 많이 외국에 소개되면 좋겠다.


번역가 홍한별은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위고, 2025)에 이렇게 썼다. “실제로 번역을 할 때는 ‘단어’를 번역(직역)하거나 ‘단어의 의미’를 번역(의역)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제3의 무언가가 있다.”


제3의 무언가는 인간만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는 “행간을, 침묵을, 여백을 번역”하는 지난한 일일지 모른다. 동시에 이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영역이기도 하다. 사람이라서 불완전하고, 인간이라서 공감한다. 제3의 무언가 덕분에 우리는 차이를 이해의 자리로 옮길 수 있다.


-경향신문, 2025.6.18. 기사 <사람이라서 불완전하고, 인간이라서 공감하는> 중에서




“나는 더 나은 번역이, 나아가 더 좋은 창작이 이 ‘겸허함’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믿는다. 겸허함은 사람을 신중하게 하고 ‘차이’를 어떻게 좁힐지 궁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영역이기도 하다. 사람이라서 불완전하고, 인간이라서 공감한다. 제3의 무언가 덕분에 우리는 차이를 이해의 자리로 옮길 수 있다.”


오은 시인의 문장들에 공감하며 글을 읽는 중에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 '천병희, 박경리' 두 분이 떠올랐다.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역사>를 비롯해 그리스라틴 고전 번역가로 활동하신 천병희 선생이 생전에 염려하며 강조했던 말씀이 라틴어 고전 번역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해와 공감으로 차이를 메우고 이를 창의적으로 전달하는 번역가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번역 덕분에 우리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고 낯선 사회를 경험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오은 시인의 말처럼 천병희 선생이 라틴어 고전 ‘번역’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닌가 싶다.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언어에 대한 몸부림,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언어에서 떠나질 못합니다. 그게 문학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시절, 거부하고 포기한, 극한적 고독의 산물이 <토지>였을 겁니다.”(박경리, <일본산고> 149쪽)


(대학원생은) “학부생보다 적은 만큼 집에 데려와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젊은 애를 기르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또 그것이 의무라는 생각도 듭니다.”(박경리, <일본산고> 205쪽)


오은 시인의 언어들이 ‘진실, 언어, 문학, 역사, 대학원, 교육, 의무’에 대한 박경리 작가의, 박경리 선생의 생전의 말씀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2025. 6. 20.




[문화와 삶]사람이라서 불완전하고, 인간이라서 공감하는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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