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일본산고>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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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는 인류재앙을 야기한 문명 파괴의 원인과 해결책을 문명을 일으킨 과학에서 찾는다. “오늘 이런 상황 속에서 가냘프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이 지경까지 오게 한 당자인 문명, 특히 과학인데, 결자해지라 했던가요? 그들이 풀어야 한다는 그것만이 마지막 남은 살길일 것입니다.”(일산 155) 그때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냉철함’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경리는 ‘과학’(문명)이 이 지경이 된 이유는 ‘경제 일변도의 이익 추구’와 그에 대한 숭상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또다시 ‘과학’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자신의 역사를 알고 그에 대해 반성하고 이전과는 다른 역사를 사는 것이 박경리의 문명 파괴에 대한 해결책인 셈이다. 박경리의 문제 진단과 해결책에 동의하면서도 묻게 되는 것은 과학이 ‘경제일변도의 이익을 추구하고 숭상하’ 게 만든 원인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박경리는 ‘경제일변도의 이익추구와 그에 대한 숭상’의 원인을 ‘자본주의’라는 체제에서 찾지 않는다. 그래서 해결책 역시 또 다른 체제인 ‘공산주의’에서 찾지도 않는다. 양자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근간은 같습니다. 운영 방법이 다를 뿐이지요. 두 가지 모두 운명은 같습니다. 똑같이 벽에 부딪혔습니다. 지구는 공해 때문에 멸망 직전입니다. 두 가지 모두 공범자예요. 이제는 궤도를 수정해야 합니다. 자본이니 공산주의니 떠드는 것은 모두 구시대적입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모두가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일산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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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는 인류재앙의 해결책을 자본주의와는 다른 체제가 아니라 우주의 운영 원리에서 찾는다. 문명(이성)의 ‘고뇌와 부정 속에서 피어나는 긍정’, ‘창조도 하고 파괴도 하는 능동’을 통한 균형, 그리고 그 균형 속에 내포된 가변성에서 찾는다. “균형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가변성은 바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따진 들 별수 없고 명확한 것은 없다. 그 말이 옳습니다.”(일산 143-144)
박경리가 말하는 균형의 원리에 따른 해결책은 문명의 자기반성을 통해 더 이상 ‘문명을 파괴하지 않는 것’, ‘약탈과 개발과 성장을 멈추고 문명을 지키는 것’, 그래서 삶의 터전인 ‘땅’과 그곳에서 자라나는 모든 ‘생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명을 가능케 한 과학, 즉 이성의 자기반성인 것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경제일변도의 이익추구와 그에 대해 숭상’하는 문명을 야기한 원인을 자본주의에서 찾는다.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단계인 제국주의가 문명파괴를 주도한다고 본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문명파괴를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남의 땅에 침략하여 ‘땅’을 약탈하고 소유하고 원주민을 내쫓거나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고 땅을 개발하고 파괴하고 땅과 노예를 사고팔고 부를 쌓고 자본을 늘리고 다시 금융 투자하고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 국가의 일상은 내부의 식민지를 낳고 노동자를 착취하고 실업과 공황이 발생하고 땅으로 투기하고 부를 쌓고 이웃은 적이 되고 이웃과 목숨을 건 전쟁을 해야 되고 그런 일들이 끝없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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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파괴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문명을 일으킨 과학이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문명을 파괴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약탈과 개발과 성장을 멈추거나 늦추거나 하면서 문명을 지키자는 박경리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여러 가지 물음이 발생한다.
가장 우선적으로 과학으로 개발과 성장을 늦출 수 있느냐는 것이고, 그렇게 늦춘 상태가 좋은가라는 물음 이전에 늦출 수 있느냐는 물음이 생긴다. 늦추자는 것에는 인류 문명의 다수가 동의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늦출 수 있는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라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명을 파괴하는 주범이 자본권력이라는 데에 그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도,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가 어떤 형태이든 자본이 독점하는 권력의 성격을 바꾸지 않고는 문명파괴를 늦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탈성장 코뮤니즘’(사이토 고헤이)이나 ‘노동자국가’(홍승용)와 같은 대안을 내놓기도 하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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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가 말한 우주의 운영원리인 ‘균형’과 ‘균형 자체에 내포된 가변성’에서 해답을 찾는다면 이성이 문명파괴의 역사를 알고 스스로 늦추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를 부정하고 부정되다 긍정하고 긍정되다 창조하고 창조되다 파괴하면서 현재의 상태를 지양(止揚)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운동’(칼 마르크스)을 하는 것이다. 현재 하는 모든 것의 상태를 문명 파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그리하여 ‘땅과 생명’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현재의 상태, 즉 전 지구화된 제국주의의 현재를 지양(止揚)하여 나아간 목적지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지금, 여기’ 일 수밖에 없다.
지금 여기를, 제국주의를 지양해 나가는 것. 그곳이 목적지일 것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의 ‘운영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침략과 약탈과 소유와 투기와 매매를 반복하는 제국주의의 운영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가족 단위에서부터 시민사회와 국가를 거쳐 전 지구에 이르기까지 문명을 이루는 모든 곳에서 작동하는 제국주의의 운영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 시작이자 끝일 것이다. 사회의 전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혹은 그러기 위해서라도 균형을 이루어 주는 힘으로서 원심력과 구심점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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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가 말하는 우주의 운영 원리인 ‘균형’을 무너뜨린 것은 자본권력의 독점도 포함된다. 결정적이기까지 하다. 우주적인 차원을 넘어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원인을 묻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자본 권력의 독점이라는 자본주의의 운영 원리가 생명의 긍정을, 창조를, 창조적 능동성을 죽여 버린 것이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또 다른 체제이든 인간을 긍정할 수 있는 창조적 능동성을 북돋을 수 있는 ‘본과 틀’로서 자본주의를 넘어선 체제를 추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자본 권력에 맡겨둔다면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고 이 지경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완성된 끝으로서 완전한 체제는 없는 것이고 시작으로서 현재의 체제를 지양(止揚)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주체의 능동성은 그러한 체제 전환과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진리 탐구를 통한 냉철한 객관의 추구가 ‘광기’를 잠재울 수 있기 위한, 균형을 이루어 줄 구심력으로서 ‘본과 틀’이 될 체제는 중요한 것이다.
그 체제 지양(止揚)의 시작과 끝은 박경리도 말하는 것처럼 사고가 강요당하지 않도록 고뇌하고 고뇌하여 부정하고 부정함으로써 긍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부정이며 내던져지고 거두어지는 우리의 삶이, 그렇더라도 혼신의 힘으로 긍정을 향해 제자리걸음이라도 해야 하는 것은 그 과정이 희열이며 고통이며 삶 자체이기 때문에, 고뇌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비인간이 아닌 인간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고가 강요당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인간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모든 창조는 부정될 것입니다. 영구불멸의 기적을 이룩하였다 한들 사고가 조종되는 곳에선 생명은 존재치 않을 것입니다.”(일산 122-123)
다만, 부정도 고뇌도 긍정도 현실적인 삶의 조건을 염두에 두고 해 나가야 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체제 전환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