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복기하며
올해 9월 이후로 나는 한 아이돌 그룹을 덕질하는 일, 그 그룹이 새로운 영상을 올리거나 한국에서 콘서트를 다시 해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회사에 가고, 중국 드라마를 보고, 자전거를 타러 가고, 책을 읽고, 아이들도 돌보기도 하면서 전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요즘 나를 미치게 하는 이들이 있다.
지겹고 따분했던 일상에 그들이 한 줄기 단비처럼 내려와 마약 따위 먹지 않아도 도파민이 넘쳐흐르고 있다.
그들로 인해 기대 수명의 삼분의 일 가량을 지나면서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들을 하고 있다.
그들이 디자인한 키링 치고 다소 비싼 가격의 인형을 사고, 대학 다닐 적 수강신청조차 경쟁을 피하고자 남는 강의를 들었던 내가 VR콘서트라는 것을 예매하기 위해 알람을 촘촘히 맞춰 기다렸다.
심지어 VR콘서트에서 사용할 응원봉을 사기 위해 잘하지도 않는 중고거래까지 했다.
2019년에 데뷔한 이들을 2025년에서야, 그것도 하반기가 반절이 지나고 나서야 빠지게 된 것이다.
“덕통사고”
그것은 미처 손쓸 새도 없이 나를 덮쳤다.
정확히 어떤 계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미 “모아”*가 된 이후였다.
그들이 재계약을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처참하다.
정성 들여 굽고 있던 삼겹살을 눈앞에 다른 이가 먹어버려 새로 다시 구워야 할 때보다 더 한 좌절감이었을 거다.
하지만 나란 인간은 정말이지 에덴동산에 있으면서도 추방을 염려하는 구제불능이다.
지금 그들로 인해 더할 나위 없는 황홀감을 느끼고 있는데 한편으론 그들에 대한 나의 마음이 식어버릴까 봐,
그들이 더 이상 나의 무료함을 달래주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된다.
부디 그들이 오래오래 활동해 주고 나의 마음이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일이 없길 간절히 바라본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중
*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팬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