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그저 스쳐갈 뿐
2019년 06월 25일 새벽 4시 30분
평소였다면 일어나지 못했을 시간에 미리 준비해놓았던 몸보다 큰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05시 04분
서울로 올라와 처음으로 지하철 첫 차를 탔다.
지하철이 한산할 거라 생각했던 건 내 오산이었다. 이렇게 다들 부지런히 사는구나…
나를 반성하게 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의 모습은 과거에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사를 다녔던 퇴사 전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필자야 더 이상 그 생각은 하지 말자
여행 가는 이 기쁜 날에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으니까.
인천공항 제2 터미널에 도착해 유심을 찾고 프린트를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빈대 퇴치 약을 사고 시간을 보니 8시가 되었다. 체크인을 하러 갔는데 직원분의 친절한 말이 나를 심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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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8시 20분까지 아니에요?"
"아니요 탑승이 8시 20분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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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멍청이...
당혹스러웠다.
생각해보니 9시 출발인데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여유를 부린 걸까.
비행기를 처음 타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붕 떠 있었나 보다.
부리나케 정리를 하고 배낭을 부쳤다.
출국심사가 끝나고 쉴 틈 없이 서둘러 비행기를 탄 후 정리를 하고 주변을 돌아보니 내 옆 승객은 울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가만히 있다 보니 나에게 자연스레 전화 내용이 들렸다.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하다 한 달 후에 보자며 잘 다녀오겠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내가 남자 친구가 있었다면 난 울었을까?
그때도 그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짧게 상상해보면 헤어짐의 아쉬움보다 여행의 즐거움이 더 커서 해맑게 웃고 있었을 것 같다.
음… 그래서 이렇게 연애를 오래 쉬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에어프랑스는 기내식 및 간식을 제외하고도 별도의 스낵바가 있었다.
물, 음료, 과자, 샌드위치 등 다양하게 있었던 것 같다.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라 매번 승무원분에게 요청하기가 미안했는데 마음 편히 마실 수 있어서 좋았다.
10시간이 넘는 긴 비행시간 동안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 다운로드해두었던 넷플릭스를 봤지만 이상하게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비행시간 동안 시계를 정말 자주 봤던 것 같다.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에 나와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유럽에 간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를 인터넷에서 봤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을까 봐 무서웠던 걸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기대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렇지 않은 척 유럽이 뭐 별거냐? 그냥 한 달 동안 여행하는데 그 장소가 유럽인 것뿐이야라고 생각해왔었는데 사실은 기대하고 설렜나 보다.
마치 어렸을 때 소풍 가기 전날 설레서 잠이 안 왔던 것처럼.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 경유지인 파리에 왔다.
파리지앵은 되지 못하고 바로 슬로베니아로 넘어가지만 그저 행복했다.
행복도 잠시였다.
슬로베니아로 가기 위해 환승 대기를 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쯤이면 게이트가 열리고 들어가야 하는데 감각 무소식...
아니나 다를까 악명 깊은 유럽 저가 항공 중 하나였던 그 비행기는 역시나 지연되었다.
혼자서 공항에 대기를 한다는 게 이렇게 지루할 줄 몰랐다.
다운로드한 영화를 봐도 지루했고 드라마를 봐도 지루했다.
지루함의 끝이 다다를 때 즈음 드디어 슬로베니아 류블랴나행 게이트가 열렸다.
출발시간 20시 00분
출발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눈 떠 보니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듯한 일몰이 한창이었다.
유럽의 여름은 뜨거웠지만 아름다웠다. 8시가 훌쩍 넘어서 일몰이 지기 시작했고 이때 서머타임제가 왜 생겨났는지 이해가 되었다.
유럽 여행 1일째 이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 연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필자야 진짜 시작이구나'
류블랴나에 도착하면 어둑어둑한 밤이 되겠지만 한국을 떠나 여행을 한다는 그 자체가 날 설레게 했다.
그렇게 2시간 넘게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공항 도착과 동시에 숙소 호스트에게 전화해 픽업을 요청했다.
공항 앞에서 20kg짜리 배낭을 멘 채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외국인이 나에게 다가와 연신 뭐라고 질문을 해댔다.
갑작스러운 영어 폭격으로 멍 때리고 있으니 그 외국인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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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영어 할 줄 몰라?
아… 나 영어 조금밖에 못해. 왜?
너 $@&*$& 가?
어디?
포르토$%#@$% 가?
거기가 어디야? 음... 난 류블랴나로 갈 예정이야.
아~ 그래 안녕
응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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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슬로베니아 어딘가로 가는 그는 같이 갈 동행을 구하는 것 같았다.
구글맵을 켜서 보니 내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인 '피란'의 옆동네 '포르토즈'라는 곳인 듯했다.
곧 호스트가 왔고 난 그렇게 슬로베니아에서 첫 1박이 시작되었다.
유럽의 밤거리는 위험하다는 소리가 많아 쫄보인 나는 혹시나 시작부터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 공항 근처에 있는 숙소로 잡았지만 슬로베니아에서 지내는 동안 곧장 류블랴나 시내로 갈 걸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너무나도 안전했고 평온한 곳이었다.
슬로베니아에서 지내는 동안 대한민국보다 더 좋은 곳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두려움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사라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처음 묵었던 호스텔은 운이 좋게도(?) 호스텔 전체에 손님이 나뿐이었다.
그래서 마치 내 집인 양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다음날 류블랴나로 가기 위해 다시 공항으로 가 버스를 탔다.
이제 저 진짜 여행 시작하는 거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찍어두었던 공항버스 시간표
언젠가는 이 공항에 도착해 다시 슬로베니아를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