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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라엘라 Dec 29. 2019

ep4.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feat. 소주)

술과 함께 입이 터졌다

술은 아버지의 음료일 뿐  



술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마셨다. 술은 늘 거리가 있었다. 특히 소주는 아버지의 전유물 같은 것이라 함부로 건들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엄마는 술이라면 끔찍하게 싫어했다. 내가 물을 숨 안 쉬고 마시기만 해도, 나중에 술고래가 되려고 물을 저렇게 마시냐며 혀를 끌끌 차셨다.   



술이 궁금했던 건, 수능이 끝나고 나서였다. 대학이 정해진 친구들이 하나둘씩 저녁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술은 못 먹고 집에 와야 했는데, 그놈에 신분증 검사 때문이었다. 빠른 년생인 나는, 1년이 더 지나야 법적으로 술집을 드나들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이다. 친구들도 처음에는 술집 대신 노래방을 가자고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너네들끼리 마시라며 알아서 나왔다. 

술이 싫어서 집에 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친구들이 술 먹고 뭐하고 노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뒷이야기를 해줄 때는 늘 재미있었고, 나도 그 자리에 끼고 싶었다.  





오리엔테이션첫 술을 만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가게 되었다. 교수님과의 대화, 선배님들과의 대화, 축하공연, 과별 장기자랑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리엔테이션은 뭔가 신나는 캠프의 느낌보다는, 정적인 학술대회 느낌이었다. 저녁 먹고는 특별한 일정이 없었기에, 이렇게 조용히 자고 내일 집에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방으로 올라오니 복도에 사람들이 분주했다. 다들 술과 과자, 고기, 튀김들을 각 방에 가지고 들어갔다. 오리엔테이션의 비공식적인 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2학년 선배님들이 우리 방에 야식 같이 먹자며 들어오셨다. 휑 했던 거실 한가운데에는 술과 안주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테이블도 없이 음식들을 바닥에 펼쳐 놓았는데도 양이 많으니 그럴싸했다. 음식들이 어느 정도 채워지니, 술과 안주를 중심으로 각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어색한 각자 자기소개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3학년 학회장 선배님이 들어오시면서부터 분위기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자기소개는 했다고 하니, 학회장 선배님은 이제 신나게 술을 먹자며, 게임을 제안하셨다. 선배님들 학번과 이름을 모르면 한 잔, 동기 이름 모르면 한 잔, 게임에서 지면 한 잔, 1학년이라서 한 잔, 그렇게 한 잔 씩 따라주셨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 해보는 전국 노래자랑 게임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났고, 내 잔에도 술이 채워졌다. 원샷을 하고, 내가 인상을 찡그리니 어디선가 안주가 내 입으로 쏙 들어왔다. 

소주는 쓰고, 바로 안주를 넣으면 되는구나! 

첫 잔을 시작으로, 내 잔에는 계속 술이 채워졌다. 안주도 물론이었다. 
처음엔 안주를 안 먹으려고 했다. 기름지지 않은 음식으로 조절해서 저녁식사를 했는데,  안주로 망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주의 쓴 맛을 맛보곤, 안주는 무조건 먹어야 했다. 그리고 술이 계속 들어갈수록, 덜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흐릿해지고, 눈앞에 보이는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생각만이 강렬해졌다. 소심하게 과자 한 조각, 한 조각 먹다 보니, 고기도 한 점, 치킨도 한 조각 먹고 있었다.        



 평소에는 10시면 병든 닭처럼 쓰러져 자는 나인데, 자정이 넘어도, 졸리지 않았다. 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분도 계속 좋았다. 옆에서 주는 술도 꼴깍꼴깍 잘도 받아먹었고, 게임에서 져도 술을 먹는 게 벌칙인 게 좋았다. 눅눅해진 과자도 맛있고, 식은 치킨도 맛이 있었다. 계속 마셨고, 먹었다. 내가 술고래가 될 거라는 게 괜한 말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나는 계속 더 먹고 싶은데, 한 명씩 부상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토하고, 피곤하다고 자러 들어가다 보니 거실이 점점 썰렁해졌다.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선배님들도 발이 끊겼다. 나는 선배님들이 이제 정리하고 쉬라고 하고 나서야 아쉬운 마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라면 먹을래? 



일어났더니 이미 조식 시간은 넘긴 뒤였다. 평소랑을 다르게 조금 머리가 지끈거리고 혀가 텁텁했다. 잠이 덜 깨서 졸린 기분은 아니었다. 정신을 개운하게 하려고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니 좀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어제 꽤 많이 먹은 것 같은데, 아침이 되니 또 허기가 졌다. 

어디서 누가 컵라면을 발견하곤, 같이 먹자고 했다. 아마 어제 안주로 먹으려다 못 먹은 것 같았다. 해장은 얼큰한 국물로 하는 걸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저걸 아침으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그냥 라면이 아니라, 해장 음식이야'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컵라면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었더니, 머리도 다시 맑아지고 입 안에 있던 텁텁한 것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속이 든든하게 채워진 건 덤이었다.       

그렇게 해장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오리엔테이션을 마쳤다. 동기들과는 입학식 때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살 빼면서 샀던 26인치짜리 스키니 진이 조금 끼기 시작했다. 
먹은 게 있으니 억울하진 않았다.      

(그 바지는 몇 번 더 못 입고 버려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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