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써지는 펜, 잘 써지는 공책
나는 글씨를 잘 쓰는 편이다. 아니 잘 못 쓰는 편이다. 아니 어느 편도 아닌 것 같다. 나의 글씨는 사용하는 펜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어떤 펜으로 글씨를 쓰면 계속 삐뚤빼뚤이다. 개발새발이 된다. 옆으로 쭉 미끄러지게 쓰는가 하면 자음 모임이 헷갈릴 정도로 갈겨쓰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 글씨가 잘 써지는 펜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 손이 마법에 걸린 양 부드럽고 야무지게 글씨를 써 내려간다. 내가 봐도 내 글씨가 너무 예쁘다. 그 글씨들이 마음에 들어서 이것저것 자꾸 끄적이게 되고, 짧게 쓰려고 했던 글들도 천천히 정성을 들여 길게 쓰려고 한다.
문득 이렇게 만나지는 펜들이 꼭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나는 삐뚤빼뚤해진다. 괜히 심술도 낸다. 성의 없게 대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만나면 괜히 마음이 예뻐진다. 정성을 들이고 마음을 쏟고, 또 괜히 약속을 잡아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나는 나 자신이 잘 써지는 펜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사람들을 만나면 관계에 어려움이 있었던 사람들도 좋은 마음이 되고 서로 정성을 쏟는 관계가 된다고 자부했다. 나를 좋아해 주고 칭찬해 주는 사람들이 항상 주변에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가끔씩 삐그덕 대며 글씨가 엉망이 될 때가 있다. 잘 쓰려고 하면 할수록 어긋날 때도 있다.
그건 내가 잘 써지는 펜이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잘 써지는 공책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 공책에 어쩔 때는 잘 써지는 펜이 되었다가 어쩔 때는 개발새발 잘 안 써지는 펜이 되었다가 변덕을 부렸던 건 내가 아니었을까.
잘 써지는 펜이 되고 싶었는데 한 두 번의 실수로 공책을 망쳤던 적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늘도 잘 써지는 펜을 들어 공책에 정성을 들여 나의 이야기를 끄적여 본다. 오늘 하루가 예쁜 글씨로 가득 차길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