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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범용의 습관홈트 Sep 04. 2019

너를 찾아 헤맨 시간, 어느덧 48년

# 너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니? 


나는 오늘도 참된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벌써 48년이나 되었음에 흠칫 놀란다.


‘도대체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인간도 의미 없이는 계속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한다. ‘나는 왜 이 공부를 하는가?’ 또는 ‘난 왜 이 일을 하는가?’ 등 우리는 반복적으로 이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웃긴 사실은, 행복할 때 우리는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대부분 인생의 패배감을 경험했을 때 이 질문을 던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산이며 들이며 바다로 돌아다니지만 결국 쉽게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지 않아서 스스로 직접 찾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생이 던진 난해한 질문에 현자들은 어떻게 답을 했을까? 세계 3대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생의 의미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누구에게나 다 들어맞는 인생의 의미는 없다. 인생의 의미란 자기가 자신의 인생에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설명한다.


‘모든 사람이 이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의 밑바닥에는 세계 및 자기 자신에 대한 일정한 암묵적 평가, 다시 말해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고, 세계는 이러이러하다’라는 판단이 있다. 또한 그가 자신과 인생에 부여한 의미가 놓여 있다’.


오~그렇구나.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리고 아들러는 인생의 의미를 참된 인생의 의미와 잘못된 인생의 의미로 구분했다. 참된 인생의 의미는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서로 협동하는 것이다. 반면에 잘못된 인생의 의미는 개인의 이익에만 관심 갖고 사회적 관심이 결여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어린 시절에는 아주 잘못된 의미를 부여하기 쉬운 일정한 상황이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 상황 속에 있는 사람이 바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아기에 병이나 허약 체질로 고생한 아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온통 자기를 개인적으로 멸시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는다.


응석받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이아이들은 어떠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이 항상 도왔기 때문에 자립심을 잃고 스스로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집중되어있기 때문에 잘못된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또한 어린 시절 경제적 빈곤에 고생하거나 무시당한 아이들은 사랑이나 협력에 대해 알 기회가 없다. 따라서 인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그들은 문제의 곤란함을 과대평가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한다. 그래서 결국 타인에 대한 의심이 깊어지고 자기 자신마저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세 가지 상황, 즉 불완전한 신체 기관을 가졌거나 응석받이 혹은 무시당한 상황은 아이들이 인생에 대하여 잘못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커다란 계기가 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내 인생에 잘못된 의미를 부여할 정도의 아픈 경험들과 기억들이 많이 있다. 그 기억들 속에는 늘 아버지가 출몰한다. 경제적 빈곤으로 아버지는 늘 엄했고 근검절약과 부지런함을 자식들에게 강요했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새벽 일찍 들로 나가서 논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소에게 먹일 풀을 베어 오곤 하셨다. 이른 아침이다보니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은, 아버지 눈에는 발칙하게도, 아직 꿈나라에서 놀고 있었다. 자식들의 부지런하지 못한 모습에 아버지는 어린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화를 냈고 지게의 작대기로 때린 날도 많았다.


아버지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육체적 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방법이 최고라고 맹신했다. 그런 아버지의 가난과 미천한 믿음이 내 눈에는 못마땅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 다짐이 현실이 되는 확실한 방법은 공부밖에 없다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더 공부에 열중했다.  그 결과 반에서 1등도 종종 차지했지만 아버지는 그런 나에게 ‘수고했다. 잘했다’란 칭찬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나의 열등감은 이곳에서 출발했다. 경제적 빈곤 그리고 아버지의 무시와 모욕감은 어린 나에게 다음과 같은 잘못된 인생의 의미를 심어 주었다.


나는 내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모든 우선순위를 나에게 두고 성공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어떤가? 내 어린 시절 형성된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 한 문장 속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나는 내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나만의 이익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어디에도 타인에 대한 관심과 공헌은 찾아볼 수 없다. 내 마음은 그렇게 메말라갔다.


그렇다면 이대로 나는 잘못된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며 나머지 생을 살아가야 할까? 진정 잘못된 인생의 의미를 참된 인생의 의미로 되돌릴 방법은 없을까? 아들러는 이렇게 조언한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과제이며 우리는 거기에 대처할 수 있다. 우리는 행동의 주인이다. 낡은 것이 변화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면 그 일을 수행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난 나의 잘못된 인생의 의미를 참된 인생의 의미로 되돌리기 위해 인생에 대해 보다 협동적이며 보다 용기 있는 대처 방석을 훈련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찾은 방법론은 ‘타인의 고통에 관심 갖자 라고 1번 외치기’를 매일 실천하는 것이다. 작고 사소한 일상의 습관일 뿐이다. 하지만 직장에서 또는 가정에서 누군가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 외면하지 않고 나의 이익보다는 타인의 이익에 공헌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려고 한다.


참된 인생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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