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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범용의 습관홈트 Apr 10. 2019

왕년에 내가 얼마나 잘 나갔는지도 모르면서

직장인에게도 방학이 있다.


지난 주가 그랬다. 팀장님도 해외 출장 가셨고 부서장도 하루 뒤에 해외 출장을 갔다. 에헤라디야~ 직장인들에게 선물처럼 가끔 찾아오는 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요즘 벚꽃이 한창인 봄이니 멋들어지게 '봄 방학'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그래서 지난주에 같은 부서의 동료들과 술 한잔을 했다.


나를 포함하여 요즘 직장인들은 평일에 술을 잘 마시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술을 마시는 당일은 기분이 좋지만 과음으로 인해 다음날 하루 회사 생활이 무척 힘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간만에 찾아온 '봄 방학'을 회사 집, 회사 집으로만 한정하기엔 날씨도 좋았고 기분도 좋았다.


오후 5시에 업무가 끝나기가 무섭게 동료의 차를 얻어 타고 회사 근처 고기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회사 업무 이외의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야기 꽃도 시들시들해질 무렵 누군가의 제안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오랜만에 당구를 쳐 보자고 했다.


다행히 남자 직원들만 있던 술자리였고 중년의 아저씨들이라 그런지 당구 실력도 200으로 똑같았다. 200이란 당구 실력은 골프로 치면 보기 플레이어 수준으로 초보자와 고수 사이, 즉 게임을 즐길 줄 알고 몇 가지 자신만의 필살기도 있을 만한 실력이다. 모두들 들뜬 기분으로 인근의 당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하나같이 이런 말을 뱉어 낸다.


“아~당구 친지 몇십 년은 된 것 같네. 옛날 실력이 나올까 몰라”


“난 요즘 허리가 좋지 않아서 잘 칠지 모르겠네”


등등 혹시라도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아서 200 이란 당구 실력에 못 미치는 실력이라고 놀림받을까 두려워 미리 변명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속마음은 다음과 같이 비슷했을 것이다.


‘내가 왕년에는 당구 실력이 꽤 괜찮았는데 오늘 오랜만에 치는 것이고 몸도 좋지 않은 점을 알아달라. 그니 내가 왕년에 얼마나 잘 쳤는지도 모르면서 오늘의 실력으로 제발 나를 평가하지 말아 달라’





개인 심리학의 창시자이며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의 3대 거장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패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이용한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자신의 추한 꼴을 보이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고객 앞에서 중대한 발표를 앞둔 직장인들은 일부러 병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머리가 아프거나 감기에 걸리면 발표를 하면서 실수를 하더라도 ‘저 사람은 왕년에 발표도 참 잘했는데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서 저런 실수를 하는구나. 충분히 이해가 돼’라는 동정표를 얻고 싶어 한다.


심지어 무의식 중에 두통이나 복통 같은 증상을 만들어 내어 실제로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어 버린다. 물론 몸이 아프면 괴롭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왕년의 내 모습과는 다르게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몸 아픈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자기 불구화(Self-handicapping) 현상은 심리학 용어로 자기가 뻔히 실패할 것 같은 일을 앞두고 미리 실패의 핑곗거리를 만들어 놓는 심리를 일컫는다. 자기 불구화 현상의 매력은 실패했을 때는 훌륭한 변명 거리를 만들어 자존심을 보호해주고, 뜻밖에 성 했을 때는 자존심을 한껏 끌어올려 준다는 점이다.


여러분은 자기 불구화 현상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실패했을 경우를 걱정한 나머지, 미리 핑곗거리를 만들어 놓았던 경험이 한두 번은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의 대학교 시절, 그러니까 90년대 초 중반에 토익(TOEIC) 시험이 대유행이었다. 이번 시험에서 토익 점수 몇 점 맞았는지는 친구들과의 점심식사 단골 메뉴였을 정도로 토익 점수는 자존심 그 자체였다.


토익 시험을 보는 날, 친구들보다 점수가 낮게 나올까 두려워, 시험 보는 당일 날 친구들 앞에서, "아 졸려, 어제 몸이 안 좋아서 계속 뒤척이다 1시간밖에 못 잤네~"라고 미리 밑밥을 깔아 놓는 적이 있었다. 사실은 뒤척이긴 했지만, 4시간 정도 잘 잤다.


그러나 사전에 핑곗거리를 만들어 놓아야 친구들보다 점수가 낮게 나왔을 경우에도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즉 마음속으로는‘내가 원래 영어 공부 너 보다 잘하는데 이번은 특수한 상황 때문에 점수가 낮은 것이니 이 점수로 현재의 나를 평가하지 말아 줘’라는 무언의 발악이었다.


또는 평상시에 토익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보나 마나 낮은 점수가 예상될 때, 일부러 친구를 불러내 술을 마신 후, "어제 친구가 갑자기 연락이 와서 새벽까지 술 마셨네. 대충 시험 보고 빨리 집에 가서 잘래~" 등등 변명거리가 될 만할 알리바이까지도 조작하는 대담함을 선 보일 때도 있었다.


이처럼 자기 불구화 현상은 실패의 원인을 본인의 실력이 아닌 특수한 주변 환경 때문에 망친 것이라고 변명만 찾는 비겁한 행동이다.


이를 통해, 자존심은 지켜낼지 모르지만 성공은 남의 이야기가 되는 완벽주의자들 잘못된 인식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기 불구화 현상에서 벗어나 삶을 안전하게만 살려는 태도를 버리고 실패하더라도 도전하고 성취하는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겠다.


그래서 당구는 누가 이겼냐고?


내가 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왕년에 내 실력만큼 치지 못했고 결과도 나빴지만 자존심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내가 그만큼 성숙한 것인지 아니면 자존심의 두께가 삶의 풍파에 휩쓸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얇아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아는 확실한 한 가지는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실패를 바라보는 시각이 따뜻하고 너그러워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삶을 안전하게만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왕년에 내가 얼마나 잘 나갔는지도 모르면서~’라는 꼰대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또 성공과 실패 속에서 어제의 나보다 더 성장하며 살고자 한다.


Shall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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