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보 May 07. 2022

르세라핌이 날 화나게 하는 이유

여성에 대한 고정적 시선과 아이돌


시가 총액, 방탄소년단, 글로벌 사업. 세 가지 키워드를 등에 업고 하이브 레이블은 단언컨대 한국에서 가장 화제의 중심에 선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다. 그런 하이브가 레이블로 새 출발을 알린 이후, 처음으로 런칭하는 걸그룹. 심지어는 아이즈원의 인기를 등에 업고 새출발을 알리는 사쿠라, 김채원이 합류한 걸그룹.


르세라핌의 시작은 그래서 창대했고, 모두의 관심을 얻으면서 시작도 전에 시작을 했다.

그리고 진짜로 열린 르세라핌의 문, 그 안의 모든 구조가 날, 아니, 여성 케이팝 리스너들을 분노케 했다.






멤버의 개인 논란은 차치하겠다.

그것도 그것대로 충분히 문제되는 부분이지만, 그건 기획력과는 다른 부분이니 잠시 내려두겠다.

르세라핌이란 그룹의 이름은 'fearless', 즉 두려움 없음의 애너그램화된 형태이다. 그들의 타이틀곡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과거의 과오이건 현재의 흉이든 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그들의 중심 토픽이자 메세지이며, 그룹의 정체성이 된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말하는 두려움 없음의 정의가 정말 이것이었을까?


미디어에선 여성에 관한 수많은 이미지가 떠오르고 진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여성관에 따라 그 이미지도 변화해왔으며, 당연하게도 그 이미지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변화해왔다.

2022년의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생각하는 여성은 어떤 이미지인가?

한 마디로 정의하기 감히 어려운 문제이지만, 2022년의 여성들이 원하는 여성이 르세라핌이 그리는 여성과 다름은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022년은 여자 아이돌의 전성기라 평가할 만큼, 수많은, 또한 다채롭고 개성이 돋보이는 여자 아이돌들의 곡과 앨범이 쏟아져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여성 아이돌들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것은 곧 '주체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시대가 미디어에 원하는 흐름이라고도 생각한다.


두려움 없음을 노래하는 여성 아이돌 그룹.

당연하게도 여성들은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 아이돌 그룹을 기대했다. 어떤 장르의 노래를 하든, 어떤 컨셉의 앨범을 기획하든, 어떻게 생겨먹은 의상을 입든. 적어도 이전 미디어에서 답습된, 도구적이고 주인 의식 없는, 꼭 인형 같은 여성의 이미지를 기대한 리스너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르세라핌은 런웨이 위의 차갑고 무감한 표정의 모델들이 가진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다. 당당하게, 망설임없이 어떤 실수와 조건에도 상관없이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런웨이의 끝까지 도달하는 패션 모델들은 정말로 두려움 없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패션 모델들을 두고 쏟아지는 수많은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다. 그 어떤 직업과 산업보다 인간의 몸을 대상화하며, 옷을 보이기 위해 도구적으로 인간을 사용하는 건 물론이요, 정형화되고 만들어진, 왜곡된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심어 개성을 죽이고 모두의 미적 기준을 획일화한단 비판. 정말로 하이브는 들어보지 못했을까? 정말로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을까?


그래, 패션모델을 차용한 것도 좋다.

수많은 패션모델들은 여전히 여성들의 워너비이며, 그들의 비주얼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그들의 직업의식, 그 몸을 위해 들이는 수없는 노력은 여전히 박수받을만 하다. 그런데 르세라핌은 그런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두려움 없음을 노래하고 싶었다면, 그걸 그룹의 정체성으로 두고 싶었다면.

멤버들을 그런 식의 이미지로 소비해선 절대로 안됐다.





엎드려 바닥을 치는 안무, 흔들리는 멤버들의 상체, 그리고 클로즈업된 멤버들의 상반신. 미성년 멤버에게 입혀진 지나치게 짧은 의상. 테니스 라켓을 들고 짧은 테니스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언발런스함. 꼭 어딘가에 묶인 인형처럼 차갑고 무감한 표정의 멤버들과 조금은 괴기하기까지한 포즈. 무력하고 의지 없어 보이는 멤버들을 잡는 뻔하디 뻔한 카메라의 시선.

수많은 티저 이미지와 뮤직비디오, 안무, 그룹 티저, 그 모든 것들을 보면서 'fearless'라는 본연의 의미를, 곡의 가사가 이야기하는 흉짐과 상관 없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당당함을 읽은 대중이 몇이나 될까?

그 수가 현저히 적을 거라는 건 르세라핌의 가사와 메세지보다 르세라핌의 의상과 안무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인 각종 커뮤니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자, 그럼 이쯤 되면 르세라핌의 데뷔 앨범은 실패한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그룹의 정체성을 보이지 못한, 혹은 시류를 읽지 못하고 처참하게 뒤떨어진 정체성을 보여준 데뷔 앨범을 들고 왔고, 사람들은 그룹의 멤버, 음악에 집중하기 보다 그들의 개인 이슈와 기괴하다 싶을 정도로 성적 대상화된 그들의 안무와 의상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정말 르세라핌의 데뷔 앨범은 실패했나?


그렇지 않다는 점이 나를 더 화나게 한다.

결과적으로 르세라핌은 잘 될 거다. 매우.


이미 데뷔해서 탄탄한 팬덤을 지녔던 두 멤버가 있는 건 물론이고, 데뷔 이후 쏟아지는 이 수많은 노이즈들까지. 르세라핌을 향한 관심은 미친듯이 치솟고 있다. 이건 곧, 그 다음 앨범은 어떻게 하나 보자, 하는 눈들이 많다는 뜻이 된다. 관심은 곧 돈이 되고 성공의 요인이 된다. 르세라핌은 시작도 전에 미친듯한 관심을 받았고, 앨범이 나온 뒤로도 관련한 이야기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걸로 성공이다. 데뷔 전의 관심을 앨범 발매 이후에도 가져갈 것. 그게 아마 데뷔하는 르세라핌의 목표였을 것이다.

데뷔 앨범의 활동, 그리고 다음 앨범이나 싱글 컴백까지. 그 사이에 멤버들은 무슨 죄냐며 입덕하는 팬들도 있겠고, 우습게도 이런 컨셉을 진심으로 바랐던 몇몇 팬 - 아마도 남초 팬덤으로 대표되는 사람들 - 들도 있을 거다. 그러면 르세라핌이 두 번째 컴백에서 터무니없는 짓만 하지 않아도 르세라핌은 성공한다.


현재의 아이돌 시장은 무엇보다 소속사가 중요해졌다.

멤버 개인의 역량이나 매력보다도 그들을 뒷받침해지는 소속사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미 레드오션인 아이돌그룹 시장에서, 튀기 위해선 어지간한 자본으로는 될 것도 안 된다.

독특하고 새로운 컨셉을 발굴하고 새로운 멤버들을 뽑아오고 트레이닝하고, 준수한 퀄리티의 음악과 안무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위해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돈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쏟아부었대도 들어보지 못한 소속사에서 데뷔한다면, 회사의 오너, 최소한 프로듀서가 유명하지 못하다면, 대중은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다.


그러나 르세라핌은 그런 의미에서 최적의 환경을 갖췄다.

충분한 자본과 유명한 오너와 프로듀서, 걸출한 동소속 가수들까지. 이번 앨범이 그랬듯 다음 앨범의 퀄리티도 꽤나 준수할 거라는 이야기다.

르세라핌의 컨셉을 신랄하게 비판한 나 조차도 르세라핌의 앨범은 비판할 수가 없었다.

쓰인 악기 소리부터 마스터링까지, 미안하지만 중소기획사에서 영혼을 끌어다 만든 곡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준수하다. 소위 말해서 '돈 냄새'가 난다는 거다. 앨범만 그런가, 사실 멤버들이 입고 나온 의상만 해도 벌써 명품 브랜드로 도배다. 자본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하이브는 아마 다음 앨범도 이 정도 퀄리티는 충분히 나올 만큼의 자본은 가지고 있을 거다.

결과적으로 르세라핌의 중박 이상의 성공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아마 르세라핌은 충분히 잘 될 것이다.






하이브의 최근 작들을 보면, 하이브의 리더들이 감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조금씩 느낄 수 있다. 팬덤을 운용하는 방식, 데뷔한 그룹들의 컨셉, 데뷔한 그룹의 멤버 구성. 여러모로 지금은 먹히지만 당장 1-2년만 지나도 먹히지 않을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하이브가 꿈꾸는 찬란한 무지갯빛 미래는 쉽지 않다.

회사가 한창 팽창하고 성장하는 시기에 경영진들과 리더들이 취하는 자세는 정말로 큰 무게를 가졌다. 단순히 몇 가지 프로젝트의 운명만 달린 게 아니라 회사의 운명까지 그들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 하이브의 리더들은 꼭 안개속에 있는 것처럼 군다. 모든 시대의 흐름과 대중이 그들에게 내는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는 것만 같다.

믿기 어려운 익명 커뮤니티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르세라핌의 데뷔를 두고 사내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고들 한다. 실제 결정권자들을 직원들이 말리려 애써보았으나 실패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최근 하이브의 이해가지 않는 행보들에 조금은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성 아이돌의 이미지와 대상화가 문제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여성 아이돌과 남성 아이돌은 조금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남성 아이돌을 보고 그렇게 되고 싶다 말하는 이성 팬들은 많지만, 여성 아이돌을 보고 그렇게 되고 싶다 말하는 이성 팬들은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아이돌들은 변화해왔다.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에서 사랑을 직접 찾아가거나, 사랑은 없어도 된다는 능동적 존재로 변했다. 시대가 변화하며 아이돌들도 변화한 거다. 그러면서 여자 아이돌 팬덤의 형태도 변하기 시작했다. 남자 아이돌의 팬덤이 그랬던 것처럼 음원보다 음반이 잘 팔리는 그룹이 생기기 시작했고, 대중보다 팬덤을 노리는 그룹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마 이런 흐름은 더욱 길게, 그리고 더 크게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르세라핌은 아직도 과거 그 어디와 현재 어딘가에서 줄을 타고 있다.

하이브는 각성할 필요가 있다. 이대로는 그 무엇도 되지 않는다. 회사를 위한 장기적 이익을 위해서라도, 하이브는 변화해야 한다. 당장 다음 앨범부터도 문제다. 변화해야 한다.

바람이 아니다. 이건 케이팝 고인물로서 할 수 있는 냉정한 경고다. 이대로라면 하이브는 5년 안에 현재의 아성의 반도 못 미치는 회사가 될 거다. 당연히 더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또 떼어 이야기해봐야겠지만...


언젠가에는 하이브가 그리는 장밋빛 미래의 일원이 되고 싶었던 팬으로서 간절히 바라본다. 하이브가 다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 흐름을 이끌어주길. 



매거진의 이전글 NCT127 메인 보컬들에 대한 간단한 고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