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空白)

자아, 181123

by 하봄

백이 처음 만난 그는 분홍이 되려 했다

네가 나를 도와줘야 해

붓에 살살 긁혔을 뿐인데

온몸이 붉게 물들었지

그래도 참았다 빨강을 위해서


파랑은 더 높은 존재가 되길 바랐다

바다는 그저 휘몰아칠 뿐야

구름을 비추고 싶지 않아

품 안에서 이리저리 옮기고 싶어

백은 구름이 되기로 했다


소원은 회색으로 두껍게 어긋나 버렸다

하늘에 안겨 구르고 싶어

흑은 파도를 높게 만들고

친구를 부숴 검은 피를 흘리게 했지

나뭇조각이 흩어지며 백을 찢었다


탁해진 파랑은 어둡게 쏘아붙였다

내가 원한 건 하얀 구름이었어

때 묻지 않은 온전한 흰 것 말야

꿈과 멀어지게 한 네가 미워

출렁이며 청은 백을 삼켰다


매미가 지나간 자리엔 팔레트가 있었다

둥실둥실 붓과 춤추고 있었지

색이 있는 곡선을 그리면서 말야

풀어진 물감을 따라 들여다보니

더 이상 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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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