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난곡 마을
기수가 화곡동 달세방에서 다닐 때 춘호와 대근이는 발과 머리가 벽에 닿는, 입구에 ‘달방 있음’이라는 푯말이 걸린 여인숙에서 생활했다. 베니어 합판에 황토색 니스가 반질반질한 여인숙 문을 밀고 들어가면 고만고만한 작은 방들이 많았다. 복도 맨 끝 방이 그들의 보금자리였다. 창문 너머로 지하철 공사 현장이 내려다 보이고 그 너머로 붉은색 벽돌에 하얀 슬라브지붕을 한 양옥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기수도 몇 부 안 되는 배달을 마치면 그들이 있는 여인숙을 찾았다. 두 친구는 아무렇게나 누워 만화책, 무협지를 봤다. 그러다 해가 넘어가는 시각에 맞춰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기수에게 좋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지속될 수 없다. 그들의 아지트를 찾아가는 날이 줄어 들었다. 몇 번인가 더 가고 발길을 끊었다. 종아리가 당겨올 때까지 골목을 걷고 또 걸어도 밖에 있는 것이 좋았다. 여인숙에서 그들처럼 뒹굴거릴 수 없다. 골목을 누비다 보면 아련히 고향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좋았다. 신림동 일대는 서울이라 하지만 아직도 옛 정취가 남아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 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서울 생활을 시작하는 동네 중 한 곳, 팔도 사투리가 고루 들리는 골목, 서울 사람이되 시골 티를 벗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서 좋았다. 난곡을 주로 갔다. 신림3동보다 난곡이라고 더 많이 불렀다. 판잣집들이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이어져 있고, 마을 입구가 시내버스 종점이었다. 두 사람이 비껴가기 힘든 골목이 이어지고, 오르는 중간에 셀 수 없이 많은 집의 입구가 있었다. 어떤 집이고 구부정하게 엎드려 들어가야 했다.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어쩌다 늙은 할머니가 수쳇가에 요강을 비우는 모습이 보이고, 흘러내린 콧물이 볼 양쪽에 달라붙어 말라버린 얼굴로 마당이라고 하기에 너무 초라한 수돗가에 아이 혼자 있었다. 하염없이 골목을 돌아 마을 꼭대기에 올랐다. 마을 꼭대기가 정상이었다. 헐벗은 공터가 남아 있고 노란 개나리가 무성히 피었다. 오른쪽으로 10층 높이 아파트가 산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산 이쪽과 저쪽 모습이 달랐다. 멀리 도로 가운데를 따라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었고, 맞은편 언덕으로 양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옛날에 산소자리였을 언덕에 앉아 발아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지금쯤 고향 마을은 앞뒤 산에 진달래가 온 산 가득 피었을 것이다. 그 사이를 여러 종류의 새들이 노래하며 날고, 논두렁에 매어 놓은 어미 소가 달음질치는 송아지를 부르는 소리도 들려 올 것이다. 아버지 얼굴도 떠오르고, 머리에 수건을 맨 어머니 얼굴도, 동생들도 떠올라 잠시 눈물을 훔치고 내려오는 날이 많았다. 난곡 산꼭대기, 기수가 좋아하는 장소였냐고? 그렇지 않다. 혼자 쭈그리고 앉아 울기에 알맞은 곳이라 자주 갔을 뿐이다. 그렇게 울고 나면 부모님 생각 동생들 생각이 가셨다. 서울에서 맘껏 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도 괜찮았다. 그 뒤로 꼭대기를 얼마나 자주 갔는지 세어보지 않았다. 자주 갔을 것이다. 그곳 아니면 그저 걸었다. 하염없이 골목을 걷고 또 걸었다.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왔다. 그 당시 일기를 보면 한자로 썼으면 더 어울렸을 ‘남아입지출향관’을 굵게 써 놓고는 했다. 남자가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난다라고 주석까지 달아 놓았다. 크게 성공하기 전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 서울 생활이다. 가방 속에는 중학교 반 팔 체육복, 그 체육복에 입은 흰색 바지와 졸업식 때 학생회장을 한 공로로 이사장상으로 받은 수학 사전, 그리고 영어 단어장이 들어 있었다. 그동안 펼쳐 본 적은 없지만 놓지 않았다. 한시도 놓아 본 적이 없다. 기수의 십 대 시절이 그 가방과 함께 서울 남쪽 그 동네를 그렇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