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흔적

28.완벽한 금발

by 재학

완벽한 금발이었다. 눈이 부시다. 햇빛 아래 찬란히 빛난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모든 감각을 멈추게 만드나 보다. 물소리도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걸음도 멈추었다. 아이에게서, 정확히는 머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이가 돌아섰다. 넘겨 빗은 머리가 아이를 따라 물결을 만들었다. 열 살이나 열한 살 정도 되었을 것 같다. 하얗고 작은 얼굴의 검은 눈동자가 기수 머리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우리나라 사람인데, 어디까지 이국적이었는지 빠른 판단이 안섰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여 여자아이가 뒤돌아 뛰어가 버렸다. 하늘거리는 치마 아래로 다리가 가늘었다. 금빛 물결이 허리에서 춤을 췄다. 낮은 지붕 속으로 사라진 금발의 잔영이 길게 남았다.

그 뒤로 며칠 동안 몇 개의 동네를 지나고, 산길을 걷고, 문경읍 버스터미널에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보내다 서울행 버스를 탔다. 어디서부터였는지 대근이는 신발 한 짝으로 다녔다. 학습지가 사라진 기수의 가방도 가벼워졌다. 서울에 돌아가도 학습지 사무실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가는 내내 춘호는 말이 없었다.

셋은 그렇게 헤어졌다. 고속버스에서 내려 어떤 표정으로 헤어졌는지, 무슨 말을 하며 돌아섰는지 기억은 없다. 그냥 각자의 길을 갔을 것이다.

기수에게 10대는, 꿈과 희망, 절망에 몸부림치던 시기, 삶의 고달픔에 허덕이면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시기였다. 회상만으로도 가슴을 적시는 시기, 기수의 10대가 그랬다. 아름다우면서 슬픔 가득한 나날이 오랜 흔적을 남길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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