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오래된 흔적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출렁이며 걷는 여자를 보면 산골짜기 낮은 지붕으로 사라진 금발의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십 대, 치열함, 어둠을 헤치고 다닌 시절이었다. 보일 듯 사라질 듯 한 줄기 빛을 쫓아 살았다. 치열함은 계속되었다. 멈출 수 없었다. 휴식을 사치처럼 살았다. 그렇게 마흔 바다를 건너고, 삶의 시간이 쌓이면서 추억도 더해졌다. 그리고 추억은 가까이에 있었다. 30년의 시간을 넘어 왔다.
50을 넘으며 삶은 단조로웠다. 휴일이면 아내와 성당에 가고, 탄탄하던 몸도 동그랗게 변해 갔다. 회사와 가정도 순탄했다. 회사는 몇 개의 동아리가 있었다. 처음에 골프 동아리를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회원 수준이 10년 이상 프로급이었다. 수준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부담이 됐다. 그러다 산악회가 다가왔다. 처음엔 재미있었다. 버스가 기다리는 전철역에 갈 때 마시는 새벽 공기도 좋았고, 돌아와서 어울리는 술자리도 즐거웠다. 시간이 갈수록 술자리가 늘어났다. 산을 내려와 1차로 마시고 승차, 차 안에서 2차, 도착해서 동네 술집 3차로 이어졌다. 산악회가 갖어야 할 본질과 멀어지고 있었다. 하긴 산행보다 술에 무게를 둔다면 그것보다 즐거운 모임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다 몰려다니는 산행도 힘들었다. 함께 가면 바빴다. 앞서 가는 팀을 따라 가는 것도, 그렇다고 뒤쳐져 오는 팀에 속하는 것도 편하지 않다. 나뭇잎 밟는 소리, 조금 떨어진 나무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지저귀는 산새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처음 몇 번의 결석이 힘들지 나중에는 익숙해 진다. 차츰 산악회 출석이 뜸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출석 해야 할 것 같다. 총무 일을 보는 고향 후배의 애원 때문이다.
“형님, 함께 갑시다!”
“왜? 이번에도 못 채웠어?”
“예”
“회비만 내면 안될까?”
“에이~ 형님도”
“그래 알았어. 이번에는 어디로 가는데?”
“선유동 계곡으로 갑니다.”
오랜만에 새벽 공기를 마시며 전철역으로 나갔다. 휴일 새벽의 한적함이 도로 가득했다. 버스에 오르니 총무가 김밥 한 줄과 생수 한 병을 준다. 앞뒤에서
“오랜만이야, 자주 보자구”
하는 인사가 날아온다.
“어, 그래, 게을러서…”
가볍게 응수하며 낯선 얼굴에게도 눈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