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치 보고서 듣고 온 날)
버치 보고서.
한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수 많은 사람 중 한 사람, 미국인 이름이다. 순전히 호기심으로 읽었다.
여느 때처럼 신문을 뒷면부터 넘기다(왜 이런 버릇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난 신문을 뒤에서부터 읽는다.) 글보다는 사진이 시선을 끌어서 읽기 시작했다. 흑백사진에 등장하는 가족의 단란한 모습, 아빠와 어린 세 딸. 그러고 그런 미국인 가정이지 않을까 하고 눈을 돌리는데 사진 설명에 서울 신당동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그렇게 해서 읽기 시작했고, 그리고 보고서를 쓴 사람의 강의를 들으러 가게 되었다.
부지런히 서둘렀다.
시장약국 앞에서 5005번 광역버스를 타야했다. 나른함과 졸리움은 함께 온다. 퇴근 길이라 정체가 심했다. 일찍 도착해서 간단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는데...1시간 30분이 걸렸다. 언제나처럼 약간은 들뜬 기분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좋아하는 강의를 들으러 간다는 것과 그 장소가 서울 한 복판이라는 것이 기분을 들뜨게 한다. 때로는 휩쓸려 가는 인파의 일부분으로 움직이는 것도 기분 좋다. 급한 볼일이 있는 것처럼 발걸음을 빨리했다. 서울에 오면 그래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왜일까. 모두들 바쁜데 홀로 한가로이 걷는 것은 미안함과 어색함이 함께 오기 때문일까?
오늘 탄 5005 번 광역버스는 처음이다.
그 동안은 5017번을 타고 시청 앞에서 내려 광장을 가로지르는 길을 택했었다. 한 겨울이면 등장하는 광장 앞 노천 아이스링크가 생둥하게 느껴지곤 하는 길이었다. 광장을 건너 대한문 앞을 지나면 돌담길이 나온다. 여성들의 또각거리는 하이힐 신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길, 가끔은 외국인들이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는 모습도 보기 좋은 길. 후마니타스를 가기 위하여 택한 탁월한 길이다. 그런데 오늘은 5005번 버스 덕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내렸다.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는 이 길로 가는 것은 처음이다. 아무래도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내비게이션을 켰다. 17분 걸린다고 알려준다. 빠듯하다. 발걸음을 빨리 했다. 다른 사람을 앞질러 걸었다. 횡단보도를 두 개 건너고 오른쪽으로 돌아서니 저 멀리 눈에 익은, 5107번 버스를 탔을 때 건물(호텔)이 보인다. 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길 건너에 대한문이 나타났다. 이제 알겠다. 익숙한 길이다. 돌담길은 오늘도 아름답다. 날마다 저 길을 걷는 사람은 행복할거야. 서울의 아름다운 길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길을 내 길처럼 걸었다.
두리번거리지 않는 것이 내 길인 것이다. 어둑해진 길 옆으로 작은 음식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잠깐 잊었던 시장기가 밀려왔다. 걸음을 빨리 했다. 강의실 앞에 초코파이와 커피가 있을 것이다. 익숙하게 여적향 건물로 들어섰다. 경비아저씨가 쳐다보지도 않고 옆 건물로 가라고 한다. 어디라구요? 옆 후마니타스 12층입니다. 호기롭게 들어 섰다 멋쩍게 돌아서 나오는 경우가 이런 것인가 보다. 스마트폰 문자를 확인하니 장소 변경이 있었다. 제목만 보고 닫은 습관이 불러온 일이다. 건물 중앙으로 들어섰다. 이 건물을 처음 왔을 때도 헤매던 곳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12층을 올라갈 만한 입구가 없다. 할 수 없이 편의점 문을 열고 물어 볼 수 밖에. 편의점 주인이 알려준데로 밖으로 나와 옆을 보니 입구가 보인다. 한심하다. 땅만 보고 걸었나? 아니다. 이 건물은 확실히 이상하다. 입구가 너무 헛갈리게 만들어졌다. 누구든 처음 이 건물에 볼일이 있는 사람은 중앙계단으로 들어 설 건데 막상 가운데 길은 이 건물에 온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1층에 빵집하나, 편의점, 분식점과 그 옆으로 2층 카페 올라가는 길 밖에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2층 이상 올라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2층 카페를 몇 번 오르내리곤 했었다.
12층 후마니타스를 가는 입구에 들어섰다.
엘리베이터가 한산하다. 여적향 가는 엘리베이터는 북적거렸는데. 12층에 내리니 강의 시작 3분전이다. 초코파이가 남았다. 두 개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섰다. 대부분 자리가 찼다. 맨 뒤 책상에 앉았다. 앞 사람들 뒷모습이 최소 60대 이상들이다. 뜻밖이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처럼 학문적(?) 호기심으로 나왔을까. 주제가 흥미로워서? 남는 시간을 교양으로 채우려고? 짐작이 어렵다.
버치보고서.
신문 연재 글을 읽었다. 지면 한 면을 가득 채워 정독보다는 속독으로 읽었다. 흔치 않는 소재였기에 눈이 갔다. 평소 이런 소재를 좋아 하기에 자연스럽게 읽은 것도 있다.
대부분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내용, 구체화되지 못한 지식들이다.
고등학교 교과서 수준에서 한 걸음 나간 정도랄까. 질 높은 강의가 주는 기쁨을 만끽하자. 군더더기 없이 듣고자 하는 내용으로 2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중간 5분 쉬는 시간도 아깝다. 지적 허기가 아니라 충족이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의 희열이다.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쁨, 설마 했는데 사실인 것, 알고 있던 사실과 전혀 다른 것을 들었다. 지적 빈약함을 탓한 것이 아니다. 왜 몰랐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한강을 건너는 버스 안에서 뒤늦게 떠오른 질문을 메모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가족에게 소감을 이야기했다.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정말 열심히 공부 할 것 같다고.
배움의 기쁨과 아쉬움에 가슴 아픈 저녁이었다.
2019.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