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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 Nov 14. 2023

아버지의 해방일지

독서일기 3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겨울을 제촉하는 비가 온다.

이런 날은 소파에 파고들어 책 읽기 좋다.      

TV 리모콘 옆에 파란 표지 책 한권이 있다.

두껍지 않고, 크기도 좋다.

하루 이틀 만에 읽을 수 있다. 

한 손에 쥐어지는 편한 책이다.

     

소설은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로 시작한다. 

옆에서 이야기해 주듯 쉼 없이 읽힌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부모가 맺어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이 싫어 혼인 전날 도망간 아버지, 

(나중에 딸도 아버지가 빨치산이었음을 알게 된 신랑 아버지에 의하여 결혼식 전날 파혼을 한다.) 

민중을 입에 달고 사는 아버지, 그래서 오지랖과 보증으로 평생 빚을 갖고 있는 아버지, 

노는(?) 소녀와 스스럼없이 맞담배를 피우는 아버지, 

집안을 거덜 낸(작은아버지 표현) 아버지, 

집안의 자랑이자 원수덩어리였던 아버지, 

생사가 불분명한(낙동강 도하 작전에 죽었음이 거의 확실한) 빨치산 동지의 부인과 재혼한 아버지, 

카빈총 들고 뛰어 다니던 지리산과 백아산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 딸을 아리라 이름지은 아버지, 

마을 사람(민중)의 일이라면 내 일보다 먼저라는 신념으로 동네 머슴을 자처하며 밖으로만 도는 아버지,

사회주의자이며 유물론자인 아버지, 그러면서 박사 학위 받은 딸이 다른 사람보다 나아 보여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그 아버지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다.

‘사램이 오죽 하믄 그랬겄든가’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은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꼭 남 같다.

‘사회주의자라면 농민 자식, 노동자 자식을 자랑삼아야 되는 것 아닌가, 박사라고 좋아하기는, 이러니 사회주의가 망했지’   

  

빨치산의 딸이,

‘빨갱이의 자식으로 사는 인생 이렇게 힘들어요.’

라고 했다면 힘듦을 이기고 읽어 낼 수 있었을까? 중간중간 몇 번이나 덮었을 것이다. 글을 읽는 내내 무거움이 짓누르려 하면 교묘하게, 가볍게 비켜 준다. 

아버지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바라봤으면, 얼마나 사랑하면 가능할까? 

(나는 이렇게 쓸 자신도 역량도 없다.)

     

난 아버지에 대하여 쓴다면, 무엇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아버지와 추억이 별로 없다.

중학교 졸업 후 집을 떠났고, (그 뒤로 1년에 한두 번밖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도 서둘러 세상을 떠나셨으니 (아버지 나이 56에) 아들이 가장으로, 아버지로, 남편으로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가셨다. 

물론 아버지와 추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드문드문 들른 집에 술이 잔뜩 취해서 횡설수설 중에 진담이 몇 번 있었다.

     

아버지는 8남매 중 일곱 째 였다. 

위로 형 둘, 누나 넷. 

두 형, 즉, 큰아버지와 작은 큰아버지는 성격이 달랐다. 

동네 골목에서 만난 큰아버지는 

‘아야 밥 잘 먹고 다니지?’

‘꼴망태 그렇게 무겁게 지면 키 안 큰다.’

자상하셨다.     

반면 작은 큰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직설적이고 성격이 급했다.

당연히 동생(우리 아버지)에게도 언제나 꾸중이었다.

‘술 좀 그만 쳐 먹어라. 이놈아’

는 다반사였다.

그런 성격이 조카들이라고 달랐을까? 

무서워서 가능하면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 작은형과 관계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그날도 술이 취했고 무슨 이야기 끝에 

‘네 작은 큰아부지 정이 깊은 사람이다.’  

   

그러려니(술주정인줄 ㅠㅠ), 무슨 말인지 몰랐다.

동기간 어느 누구에 대한 평가 한번 없으신 분이다.

그런 분이 작은형에 대한 평가를, 딱 한 번 하셨다.

세월이 흐른 뒤 문득 왜 그랬을까 긍금하기도 했다.


잊어버릴만 하면 ‘아버지’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고, 그리고 읽는다.

책은 아버지의 시간으로 끌어 들이고, 그중 하나, 작은형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작은 형하고만 공유한 추억이 있었을까? 

    

세 형제 중, 아니 팔 남매 중 아버지가 가장 일찍 돌아가셨다.

예전에는 집에서 치루었다.

큰형은 막내 집에 들어와 이것저것 챙기고 돌보셨는데, 작은형은 골목에서 사흘 내내 서성거렸음을 안다. 

‘썩을 놈. 썩을 놈’

하시면서.     

아버지 49제에 작은아버지가 오셨다.

아버지 쓰시던 물건을 태우는데 불가를 서성거리다 가신 것도 안다.

작은형은 그런 분이었다.

     

지금도 작은형 이야기를 하던 (술 취한) 아버지 얼굴, (술 취한) 아버지 목소리를 떠올리면 목이 메인다.

아니, 아버지라는 말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어머니가 들으면 서운하실지 모르겠다.)     

결국 세 형제는 어쩌면 비슷한 성격이었는지 모른다.

표현 방법이 달랐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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