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4 (하얼빈 김훈. 문학동네. 2022)
뮤지컬 영웅, 부천, 소설 하얼빈, 서울 중구 소월로91…
공통점은?
안중근 의사다.
소설 하얼빈을 읽었다.
김훈 소설을 읽을 때마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혼미(?)해진다.
하얼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목만으로도 안중근을 떠올릴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등장인물이 단출하다.
1. 안중근
위인은 태어나는 걸까? 만들어지는 걸까?
위인전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황해도 산골이지만 지역 세력을 형성하던 집안의 장남, 어지러운 나라 사정에 한눈을 감으면 얼마든지 안온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문명개화로 이끌어 주는 선진 세력에 감사하고, 편승하고, 일조했다. 안중근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뒤쳐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데 절호의 기회라 여기거나 또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신념을 만들고 바라만 봐도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타고난 성정이 그러했을까?
집안, 주변이 국가관을 그렇게 만들어 주었을까?
어렸을 때부터 밖으로 나도는 아들의 기질을 눌러 주느라고 무거울 중 뿌리 근을 써서 아명 응칠을 중근으로 바꾸어 준 것을 보면 타고난 기질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시국에 비분강개 하는 문중 사내들과 함께 자랐다.
2.우덕순
기묘생 토끼띠로 안중근과 동갑이다.
안중근이 연해주 일대에서 모집한 병력으로 두만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진군할 때 안중근 부대의 하부 대원이었다. 말수가 적고 부대 안에서도 늘 혼자서 떨어져 있었다. 의병대원들의 목청 높은 시국담에 끼어 들지 않았고, 투쟁의 대의를 말하지 않았다. 그가 싸움의 대열에 끼어든 것을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안중근이 하숙방으로 찾아와서 술을 사주면서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말을 했을 때 우덕순은 안중근이 왜 왔는지를 대번에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에게 동행할 것인지를 대놓고 물어 보지 않았고, 우덕순도 같이 가자고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안중근이 이토의 만주 방문을 알리는 신문을 보여 주었을 때, 우덕순은 안중근과 함께 가기로 되어 있는 운명을 느꼈다.
3. 이토 히로부미
이토의 침대 발치에는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항에 건설 되었던 파로스 등대의 모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토가 주물 장인에게 의뢰해서 제작한 청동제 스탠드였다. 모형 등대에 수면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양과 서양, 대양과 대양을 연결하는 이 문명사적인 항구의 옛 등대를 이토는 거룩히 여겼다. 그것은 이 세상 전체를 기호로 연결해서 재편성하는 힘의 핵심부였다. 신호로서 함대를 움직이고 신호로써 대양을 건너가는 기술은 바로 제국이 갖추어야 할 힘의 본질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중국을 섬겨 왔으므로 열복이라는 말을 알 것이다. 열복은 기뻐서 스스로 따른다는 뜻이다. 이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고 동양의 평화를 실현하려면 조선인들의 열복이 필요하다. 열복은 일본 제국의 틀 안으로 순입하는 것이다. 열복은 문명개화의 입구이고 동양 평화와 조선 독립의 기초이다.’(경복궁 경회루에서 열린 송별연에서 한 연설)
4. 김아려
안중근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1946년 상해에서 죽었다. 출입이 무상했던 남편 중근은 한 번 나가면 돌아올 날짜를 말하지 않았다. 남편이 없는 동안 아이들을 낳는다. 젖 먹이 아이가 자라서 늘 옷차림이 반듯했고, 앉는 자세가 곧은 시댁 문중 사내들 틈에 앉는 모습을 상상한다.
5. 조마리아
안중근의 어머니로 거사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살았다.
며느리 아려가 큰아들인 분도에게 어미의 정을 과도하게 베푸는 일을 나무란다. 말이 느려 돌이 지나서야 겨우 옹알이를 걱정하는 며느리에게
‘사내란 입이 무거워야 좋다. 말이 빠른 녀석들은 똥을 오래 못 가린다.’라고 한다.
여러 항일 혁명가들은 조마리아의 애국심과 희생정신과 용기를 기리고 있다.
6. 빌렘
청계동에 성당을 세우고 주변 마을 10여 곳 공소를 다니며 미사를 집전한다.
안중근에게 도마, 그의 아들에게 베테딕토(분도)라 세례한다. 똑 닮은 부자의 눈을 보며 안중근이 어쩌면 하느님의 자식이라기보다는 세속의 아들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뮈텔 주교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여순으로 가서 처형 직전의 안중근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베푼다. 이 일로 주교는 빌렘에게 2개월 간의 성무 정지 처분을 내리나, 강력히 반발하여 파리 외방 전교회와 교황청에 부당함을 호소한다.
7. 뮈텔
1892년 약현성당, 1898년 명동대성당 완공, 1925년 로마에서 거행된 한국순교자 79위에 대한 시복식 등 천주교가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 중추적 역할을 한다. 해주 공소를 사복 방문할 때, 열아홉 살의 안중근은 길잡이로서 믿음직했지만 위태로운 어긋남을 느낀다.
‘미개한 사회의 원주민들이 문명개화로 이끄는 선진의 노력을 억압으로 느끼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례들을 뮈텔은 세계의 후진 지역에 파송된 동료 성직자들의 보고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총으로 쏘아 죽이는 방식으로 증오를 표출하는 천주교인의 죄악에 상심한다. 백년이 넘는 박해의 세월을 견디면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는 순교의 피 위에 세속의 거점을 겨우 확보한 조선 교회가 또다시 세속 권력과 충돌한다면 교회의 틀이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한다. 안중근의 정치적, 민족적 대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얼빈의 거사를 교리상의 ‘죄악’으로 단정하며, 안중근의 거사에 부정적인 견해를 공공연하게 표명한다. (이 판단에 따라 1910년부터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남았던 안중근 도마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에 의해 1993년 공식적으로 추모한다. 이후, 2000. 12. 3 한국천주교는 한국교회가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안중근 현양사업을 전개한다.)
8. 안중근의 가족들
-안분도, 장남으로 흑룡강성에서 일곱 살에 죽었다.
-안준생, 차남으로 1939년 총독부 관리들과 함께 이토 위패에 분향하고 위령하며,
‘이토의 명복을 빈다.’
라고 말하나, 통역이 기자들에게
‘안중근이 처형 직전에 자신의 행위가 오해에서 비롯된 폭거임을 인정했다.’
라고 한다. 이토 차남에게 ‘사죄하러 왔다.’고 말하고 함께 이토의 업적을 기리며 장춘단 공원 옆에 세운 사찰 박문사를 참배하고 분향한다.
광복 직후 김구가 장제스에게 안준생을 체포 구금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를 ‘교수형에 처해 달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한다. 1952년 부산에서 죽었다.
-안현생, 장녀로 분도와 준생의 누나다. 1941년 남편 황일청과 함께 박문사를 참배한다. 그 날은 안중근의 기일이었다. ‘아버지의 죄를 사죄한다.’라고 말했다고 서울에서 발행된 신문들이 보도했다. 1946년 귀국해 1959년 사망했다.
-안정근, 동생으로 다섯 살 연하다. 여순에서 안중근이 처형될 때까지 옥바라지를 한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잡화상을 해서 성공했고, 독립운동을 위한 물적 토대를 마련한다. 그의 딸 미생이 김구의 장남 인과 혼인한다. 광복 후에 귀국하지 못하고 망명지 상해에서 사망했다.
-안공근, 둘째 동생으로 중근과는 열 살 차이 난다. 안중근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는 한편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다. 1939년 중경에서 실종되었다.
-안명근, 안중근의 큰아버지 안태현의 장남이다. 북간도에서 독립군을 양성할 군사학교를 세우려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10년간 복역한다.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하다 길림성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