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자발 없다.
참을성이 없고 행동이 가볍다.
-자발스레 까불어 댄다.
1. 큰고모
큰고모가 이 말이 할 때는 대부분 ‘사내가~’로 시작했다. 즉 자발은 남자가 명심해야 할 말이었다. 나는 남자다. 그 자발을 일찍부터 알았다.
‘자발스러운 놈’
큰고모에게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마땅히 비난받을 사람이었다.
온 동네 사람이 다 나서서 욕을 해 줘야 했다. 어린 조카가 보기에 고모를 화나게 해서, 고모 입에서 그 욕이 나오게 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호랭이가 물어갈 놈’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고모가 이 말을 했다는 것은 화가 많이 난 것이다.
큰고모는 혼자 살았다.
두 딸을 멀리 시집보내고 쓸쓸한 노년을 막내 남동생 가까이 산다고 우리 집 옆으로 오셨다. 혼자 사는 고모 말벗은 내가 했다. 잔심부름부터, 논밭 일을 할 때도 나를 대동했다. 그러고는 어린 조카에게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셨다. 큰고모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고모는 세상 풍파를 헤치고 굳세게 살아남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고모가 싫어하는 사람은 자발 떠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남자가 자발스러우면 안된다. 자연스레 자발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되었다. 그런데 자발을 떨었다. 그것도 마흔이 넘어서.
2.찜질방
또 하나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할 때였다.
강좌가 개설되었다. 연수원 위치를 보니 서울시 종로구 ○○연수원이다. 선착순, 직접 접수란다.
이런 문구만큼 이기적인 말이 있을까?
대체 몇 시부터 줄을 서야 하지?
이건 서울 사람들을 위한 연수 잖아! (나는 용인 산다.)
불평할 때가 아니다.
첫차를 타면 늦을 거다.
미리 가서 연수원 근처에서 잘까? 안되면 연수원 앞에서 노숙을 하지 뭐.
그렇게 해서 전날 막차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걸어서 연수원에 도착했다. 누군가 나처럼 미리 와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부지런히 가니 아무도 없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새벽 한 시를 조금 넘었다. 잠자리를 찾아 들기도, 그렇다고 계속 연수원 정문 앞에서 서성이기도 어중간한 시간이다. 어떻게 할까? 벌써 연수원 주변을 두 바퀴나 돌았는데. 그러다 문득 찜질방 간판이 있음이 떠올랐다. 그래 찜질방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오자.
찾아 들어간 찜질방은 동네 조그만 목욕탕 수준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 옷을 벗고 탕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몇 번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아주 잠깐 누렸나 보다.
인기척에 눈을 뜨니 부연 수증기 속에 몇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나처럼 남는 시간을 주체 못한 사람들이겠지 하고 뒤돌아 보는 순간 내 몸은 자연스럽게 물속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3.찬란한 몸
그들의 몸은 찬란했다.
천연색으로 용과 구름이 등을 휘감았고, 어떤 사람은 요염한 여인이 허벅지에 달라붙어 있었다. 뒤뚱거리며 나타난 그들의 몸을 보며, 같은 물속에 함께 있어야 하는 어떠한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쫓겨난 것이 '절대' 아니다.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다. 찜질방에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난 연수원을 가야 했다.
다시 연수원 정문에 섰다. 새벽 세 시. 아직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네 시간이 지나고 한두 사람, 자발을 떨지 않았을 사람들이 나타났다.
난 그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밤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내가 혹시 자발을 떤 것 아닐까라는 고백에 100% 맞는다고 해줬다.
고모 죄송해요. 잠시 자발스러운 놈이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