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수
변화하는 사회를 따라가지 못할 때 문화지체라 한다. 자동차는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교통 의식은 뒤쳐진다거나, 딸 같아서 그랬다는 성추행범들의 변명이 그렇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도 그런 측면이 있다. 1970년대 학교 모습을 그리는데 제약이 있었다. 언젯적 시각으로 보느냐의 문제였다. 그때는 그런 문화였다라고 한다면 그때의 시각이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분개 한다면 그 역시 적절한 시선이 아니다. 각자 살아온, 삶에서 쌓은 시선으로 바라보면 된다. 그게 답이다.
5학년 때인지 6학년 때인지 어렴풋하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당시 선생님은 왜 그렇게 교무실을 자주 가셨는지, 한 번 가면 오래 머무셨는지 모르겠다. 소사 아저씨가 피워 놓은 난롯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수다를 떠느라 그러셨을 것이다. 어쩌면 퇴근 후 학교 앞 주막에 모일 거리 이야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수업 시간이 절반이나 지나고 선생님이 돌아왔을 때 교실은 모두 기수 같아야 했다. 산수 문제를 푸느라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것도 모르고, 허리 곧게 펴고 앉아 눈앞 30cm 거리의 책 넘기는 소리만 들려야 했다. 칠판 앞에는 급장이 의젓하게 서 있고, 간혹 떠든 아이 몇 명인가 이름이 적혀 있어야 했다. 기수가 급장인 교실은 그래야 했다.
그런 모습이었다면 기수의 초등학교 기억이 남았을까? 우리를 추억으로 이끄는 기억은 아름다운 과거만이 아니다.
지독히도 쓸쓸한 기억이다.
선생님이 나간 교실은 한 명의 모범생과 일곱 명의 급장, 그리고 42명의 방관자가 남았다. 종이비행기가 날고, 딱지 내려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초를 먹여 거울처럼 반들거리는 교실 바닥에 딱지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했다. 놀이에 집중한 아이들은 선생님의 실내화 소리를 듣지 못했고, 드르륵 열린 뒷문으로 화난 선생님 얼굴이 보이고 나서야 멈췄다. 매일의 일상이었고 그 몫은 오로지 급장에게 돌아왔다. 책임감 강하고 성실한 기수가 변명했냐고?
“급장, 뭐 하고 있어! 이놈아, 조용히 시키랬더니.”
온 눈 가득 못난 놈이라 질책하는 선생님의 눈빛이 싫었고, 동전의 양면처럼 변하는 친구들이 미웠다. 성실함에 강한 기질까지 겸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선생님은 자주 교실을 비웠고, 수업의 절반이 자습이었다. 가끔은 소사 아저씨가 종 치는 것도 잊어버렸다. 한두 시간이 통째로 날아갈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지옥이었다. 선생님이 없는 교실에서 기수는 왕이어야 했다. 칠판에 이름 적는 것에 더하여 체벌권도 갖는 막강한 권한으로 선생님의 부재를 관리해야 했다.
‘급장’
한마디 하고 교실 문을 나서는 선생님의 실내화 소리가 멀어지고, 잠시 후 아득히 먼 곳에서 교무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면 기수도 변소 간다는 핑계로 교실을 나갔다. 오줌 때가 누렇게 붙은 벽 앞에서 나오지 않는 소변 자세로 교무실을 주시했다. 교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바지를 추켜 올리고 교실로 뛰었다.
선생님이라는 배경이 없는 곳에서 기수는 공부 잘하는 이이도,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여 타의 모범이 되어 급장으로 임명한 아이도 아니었다. 외롭고 나약한 존재였다.
친구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정하는 친구도 비웃는 친구도 기수가 부리나케 나가는 이유를. 마렵지 않은 오줌을 한 시간이나 붙잡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꾸중의 시간이 길지 않은 것을 보면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사춘기 소년에게 그 시절은 딱지가 져도 새살이 돋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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