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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논리

3. 기수

by S 재학

1970년대 농촌초등학교의 졸업앨범은 촌스러운 아이들이 화면 가득했다. 선생님은 왜 그리도 엄숙한 표정을 지으셨는지. 하긴 그때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잘 웃지 않는다. 웃지 않는 얼굴이 무게감을 줄 거로 생각하나 보다. 어른들과 다르게 웃음이 많았던 아이들이 많았다. 한 반에 50명이 넘었다. 콩나물 교실이라는 표현이 한참 지나 나온 것을 보면 베이비붐 세대의 시작이었다.


11월이면 졸업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구령대 앞으로 의자와 책상이 놓였다. 두 분 담임선생님 양쪽으로 여덟 명씩 섰다. 두 번째 줄은 바닥에 서고 세 번째, 네 번째 줄은 의자에 올라갔다. 그리고 마지막 줄은 책상 위에 섰다. 아버지가 면사무소를 다녔던 승원이, 양조장 집 광식이를 빼고 남자애들은 까까머리를, 여자들은 단발머리를 했다. 햇빛에 눈이 부셨는지 찡그리거나 치켜뜬 표정들로 사진을 찍었다.


키가 큰 기수는 맨 뒷줄에 섰다. 단정하게 깎은 머리,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조용한 눈, 친구들과 다른 점퍼를 입었다. 방직 공장에 다니는 사촌 누나가 추석 때 사다 준 옷이다.


그 시절 기수의 존재감은 화려했다. 수우미양가로 매긴 통지표는 온통 수뿐이었다. 방학식을 하고 집으로 가는 날 아이들은 부러움과 시샘으로 기수를 에워 쌓았다.

“통지표 좀 보여주라.”

“수 몇 개냐?”

어쩌다 음악, 체육이 우일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6년 내 이런 등쌀에 시달렸다. 행복한 시달림이었다.


그런 기수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에 소질이 없었다. 자치기, 구슬치기, 술래잡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딱지치기도 마찬가지였다.

기수가 내려친 딱지가 뒤집히지 않으면 친구 중 하나가

“바람 때문이야. 다시 해.”

라고 말했다. 당연한 것처럼 다시 딱지를 쳤다. 치기 전에 친구가 만진 딱지는 귀퉁이가 부풀어 올라 잘 넘어가게 놓이는 마법이 부려지고, 기수의 서툰 손짓에도 멋지게 뒤집혔다.


공부를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통했다. 공부를 잘하면 모든 것을 잘했다. 잘해야 했다. 지도력과 상관없이 반장은 기수여야 했다. 1등이고 반장이었던 기수가 행복했냐고?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편의에 따라 1등과 반장을 구분했다. 그들의 논리는 명쾌했다.


-우리 반장은 공부 잘하고 성실하다.

-그는 우리의 반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뽑은 반장을 존중하고 따른다.

-따라서 우리의 잘못은 반장 책임이다.

즉,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반장이 꾸중을 들어야 한다.


이 논리는 기수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유년 시절의 아픈 그림자로 평생을 따라다녔다. 공부만 잘했지 타고난 유순함과 세상물정 어두워 친구들의 논리에 휘둘렸다. 대처하는 방법을 몰라 흔들리고 당황했다.


사실 기수는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서 하나 없이 오로지 교과서와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 주는 것만으로 공부했던 시절, 기수는 공부의 정석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작은 방에 책보자기 벗어 놓고 소 꼴부터 한 망태기 베었다. 하천 둑에 매어 놓은 염소 몰아오고, 밭에 달려가 어머니가 갈무리해 놓은 밭곡식 지게로 져 나르고도 호롱불 아래 앉았다. 왜냐고?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해야 했다. 선생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숙제를 하지 않고 다음 날 학교에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책 세 바닥 써 오라고 하면 세 바닥을 썼고, 다섯 번 쓰라고 하면 다섯 번, 17쪽부터 24쪽까지 외워 오라고 하면 그렇게 했다. 이러고도 1등을 못 할 수 없다. 6년 내 반장이었고 1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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