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첫 차

5. 기수

by S 재학

어느 날 갑자기 오래된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오늘도 그렇다.

지난 주 화단 손질을 하다 풀독이 올랐다. 매년 전지를 할 때면 조금씩 부어오르고 가렵기는 했지만 올해는 심하다. 나이를 먹으면 이런 것도 약해지나 보다. 심각해졌다. 출근하자마자 조퇴했다. 피부과 검색을 하니 여러 곳이 나온다. 대부분 시술, 개선, 토닝 이런 문구다. ‘치료’에 중점을 둔 피부과를 찾았다. 자동차로 10분, 걸어서 25분이라고 나온다. 걷자. 개천을 따라 걸으면 운동도 되고 좋잖아. 지난 주 헬스클럽도 다 빼먹었는데… 운동하자. 사실은 주차 때문에 걷는 것 택했다. (지하 주차장 들어 가는 것 너무 어렵다) 양산 들고 나섰다. 개천 길로 내려서는데 아침부터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 저 사람은 야간 근무를 했을까? 퇴직한 사람인가? 오늘 휴무겠지….

목이 긴 황새 한 마리가 사냥에 열중한다. 커다란 잉어가 헤엄친다. 바닥이 너무 얕다. 황새도 잉어도 불쌍하다. 그러다 문득 그 친구가 생각났다.


서규. 중학교를 함께 다녔다. 작고 조그만 체구로 언변이 좋았다. 예술가 기질이 있었지? 공부도 잘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고를 갔다. (그때 공부는 잘했는데 가정 형편 어려운 친구들이 상고와 공고를 갔다.은행 임원 된 친구들 많다)그리고 소식이 끊겼다. 다시 만난 것은 서로 가정을 갖고 직업을 갖은 30대 초반이다. 어느날 연락을 해 왔다. 2,000cc 자주색 자동차를 타고 나타났다. D사의 에스페로. 얼마나 멋지던지.

공고를 졸업하고 조선소를 들어갔는데 맞지 않더란다. 같은 계열 자동차사로 옮겼다면서 너도 이제 마이카 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한다. 살 거야. H사의 엑셀로 정했어.

그때부터인가 보다. 자주 왔다. 점심 먹자고 오고, 휴일에 놀자고 왔다.

그 친구가 영업한 르망을 샀다.

그 친구 계속 만나냐고? 그렇지 않다. 르망이 내 첫 차가 되고 조금 있다 신도시 개발 뉴스가 나오고, 군대에서 제대한 서규 아버지가 농사 짓기 싫다고 야산 자락을 사서 양계장을 하던 땅이 아파트로 개발되고, 수십억 보상금 나오고….

승마, 요트로 바쁘다며 소식이 끊겼다.

아파트, 아파트 때문에 서규 생각이 생각났나 보다.


중학교 들어가 전이다. 자전거를 자전차로 부를 때가 있었다. 왜 그랬는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짐작은 한다. 자동차가 귀한 시절이라 바퀴로 굴러가는 것은 차라고 하지 않았을까? 수레보다 낫고 사람을 싣고 달리니 차다. 그러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등하교 시간에 신작로와 하천 둑을 따라 자전거 행렬이 이어졌다. 여름이면 파란 상의에 회색 바지를 입은 중·고등학생 형들의 자전거 행렬이 부러웠다. 고등학생 형 중 누구는 예쁜 누나를 태우고 가기도 했다.

장날도 아닌데 면 소재지를 다녀오신 아버지께서 자전거를 사 오셨다. 탈 줄 모르시어 십 리가 넘는 길을 끌고 오셨단다. 친구들과 골목에서 자치기하고 들어오니 마당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아니다. 마당을 들어서기 전에 알았다. 울타리 사이로 낯선, 우리 집에 없는 물건이 보인 것이다.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난다. 감나무 아래 서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새 자전거는 아니었지만 거의 새것과 같았다. 동네에서 자전거가 생긴 몇 안 되는 행복이 나에게 온 것이다. 나중에 든 생각인데, 중학교 입학 선물이었다기보다는 아침마다 버스비 주는 것이 귀찮아서 사 오셨지 싶었다.


어쨌든 좋았다. 그날 밤부터 자전거를 탔냐고? 그렇지 않다. 세워 놓은 자전거 위에 올라 페달을 밟았을 뿐이다. 문틈으로 확인하고 자기를 반복하며 밤을 새웠다. 자전거 덕분에 다음날부터 바빠졌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천 둑에 매어 놓은 염소 끌어오고, 여물 썰어 쇠죽 끓였다. 일이 이렇게 즐거운 줄 미처 몰랐다. 시키지도 않은 마당도 깨끗하게 빗질했다. 그러고 나서 부리나케 자전거에 달려갔다. 자전거 타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혼자 배웠다.

우리 동네는 완만한 4부 능선이다. 위등까지 끌고 올라갔다. 그리고선 페달에 한 발을 걸치고 두 손 가득 앞뒤 브레이크에 손을 얹으면 준비 끝이다. 발 한 번 굴리지 않고 빨래터까지 내려왔다. 끌고 올라갔다 타고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골목에 사람이 나타나면 울려 주는 찌릉찌릉 소리도 좋았다. 친구들의 부러움, 콧속을 파고드는 저녁밥 짓는 냄새도 좋았다.

그날도 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기 바쁘게 오늘의 과업을 완수하고 ‘나의 애마’를 끌고 나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낮은 담장 넘어 꼬마전구가 빛난다. 서서히 어두워져 가는 골목길 어느 곳쯤에 돌부리가 있고, 쌍태네 강아지는 언제 튀어나오는지 다 안다.벌써 세 번이나 탔다. 인제 그만 들어갈까? 아냐 한 번만 더 타자.

육감? 어떤 사람은 쎄 하다고 표현하는 그런 것은 있나 보다. 좀 더 커서는 내키지 않으면 아니 함이 옳느니 뭐 그런 말로 바뀐. 느낌 있다. 세 번만 타고 들어갔어야 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지독히 쓸쓸했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