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Opinion 수필

너에게 미안하구나.

9. 기수

by S 재학

일요일이면 기숙사 형들이랑 공원으로 놀러 갔다. 공단 주변에서 자취하거나 인근 공장 기숙사에 있던 남녀 공원들이 모여들었다. 두세 명씩 모여 있다 그중 용감한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고, 그렇게 짝을 이루어 영화관으로, 시외로 사라졌다. 형들은 계속 시도했고, 번번이 퇴짜를 맞았으며 그럴 때마다 기수에게 짜증을 냈다.


그런 모습을 멀뚱히 보며 공원을 돌아다니다 기숙사로 돌아왔다. 두 달 만에 더부룩하게 자란 머리가 더 이상 학생이 아님을, 공단에 다니는 아이임을 알려 주었지만, 기수 마음은 아직도 학생이었다.


시골집에는 월급날이면 갔었다. 일부러 밤에 도착하는 버스를 타고, 어두워진 논둑길로 돌아 마을에 들어섰다. 어머니 아버지는 들에서 오시지 않았다. 깜깜한 마루와 마당에 흩어져 놀던 동생들이 오빠를 맞이했다. 언제나 반장이었고, 1등이었던, 자랑스러운 오빠가 교복 입은 학생이 아닌 더벅머리로 들어서는 모습이 낯설었을 것이다.


쭈뼛거리며 엉덩이를 들고 일어서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힘든 마음을 애써 외면했다. 일부러 괜찮은 척, 공장에서 배운 건들거리는 말로 지껄였지만, 눈물이 고이는 것까지 감출 수 없었다. 양 손에 든 과자 봉지를 마루에 올려 놓은 것도 같고, 막내를 주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은 없다. 골목에서 인기척이 나고, 지게에 풀을 얹고 들어서는 아버지는 기수를 외면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너에게 미안하구나.’

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아버지가 되고, 가끔 막연함을 느낄 때면 그때 아버지의 마음이 이랬을 거라고 짐작은 하지만, 정확히 맞지는 않을 거다.



그 뒤로 고향은 밤에만 갔다. 20년 30년이 흘러도 밤에 들어서야 편했다. 이르게 도착하면 일부러 읍내에서 길게 마트를 봤다. 그래도 남으면 느릿느릿 세차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변이 어두워지면, 편안함이 찾아오면 그때야 들어섰다. 밤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둠이 좋았다.


집에 두 번인가 갔다 오고 마음을 굳혔다. 공장에 더 머물면 안 된다. 이 생활이 익숙해지면, 몸이 이런 생활을 기억하면 안 된다. 공부하자. 어렴풋이 담고 있던 검정고시를 하기로 했다.


일요일 형들이 공원에 가자는 것을 뿌리치고 검정고시 학원을 찾아 나섰다. 언젠가 간판을 본 적이 있다. 버스터미널 옆 시장 근처에 있다고 했다.


○○검정고시. 석 달 모은 월급으로 월세방을 얻고 학원에 등록을 하니 0이 되었다. 터미널 옆 직업소개소를 다시 찾아갔다. 그동안의 사정을 말하고 일할 곳을 찾아 달라고 했다. 소장이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던 소장이 따라오라며 일어섰다. 시장 입구에 있는 화공약품 가게로 데리고 갔다. 양조장 막걸리 통처럼 생긴 하얗고 파란 통이 천정까지 쌓여 있는 가게 안에서 사장님과 소장이 또 한참을 이야기하다 나왔다. 여기서 일해라.


추석2011.9.12 040.jpg


주로 자전거 배달을 하는데 그 일을 하기에 너무 어렸나 보다. 거기에 몸치였으니 더 어울리지 않아 보였을 것이다. 결국 월급을 그에 맞게 주는 조건으로 기수와 타협을 한 게 아니라 사장님과 타협이 되었다고 한다.


기수의 열일곱 봄은 여느 열일 곱 살과 달랐다. 낮에는 화공약품 배달을 하고 밤에는 검정고시 학원으로 갔다. 마침 중학교 친구가 연락이 닿았다. 희식이랑 산다며 너도 올 거냐고 했다. 희식이는 주유소에서 일하고 자기는 구둣방에서 일한다고 했다. 생활이 훨씬 나아졌다. 아침 안 먹고 저녁 건너뛰던 식사가 규칙적으로 되었다. 바쁘면 안 먹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그네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먹었다. 덕분에 거르지 않는 것은 좋았지만, 주머닛돈이 줄어 들었다. 덕분인지 혼자였을 때보다 몸무게는 늘었다.


친구 구둣방은 계림동에 있었다. 그쪽으로 배달 갈 일이 있으면 일부러 친구가 일하는 가게를 지나갔다. 전봇대에 자전거를 세워 놓고 일하는 친구 모습을 훔쳐보는 것이 좋았다. 작은 체구를 잔뜩 구부리고 구두를 무릎 사이에 끼우고 칼질을 했다. 밖에서 보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일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오고는 했다.


함께는 살았지만 셋 모두 바빴다. 주유소에서 가장 막내인 희식이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했다. 당연히 우리 중에 돈도 가장 잘 벌었다. 자주 맛있는 것을 사 주고 사 오기도 했다. 구둣방 친구는 일 끝나면 당구장을 들려왔다. 대부분 희식이랑 만나서 함께 친다고 했다. 기수는 가게와 학원만 왔다 갔다 했다. 겨우 방값만 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바람